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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식일 연작

식일

이하루 - 2023.08.13.
 
 

  여기에 상처가 있다. 미채가 등 한 군데를 짚어주었다. 맥 풀고 있던 영윤은 등이 떠밀렸다. 웃몸이 굽는 김에 목도 따라 숙여졌다. 미채의 손끝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다친 데에 일어날 법한 통증 같은 건 없었다. 곰곰 등에 신경써보 어깨 한편이 비끗댔다. 다칠 만한 일 없었어. 영윤은 고붓했던 자세를 세우며 미채의 팔을 물리쳤다. 뭐라든 아픔이 없었다. 미채는 내밀린 팔을 소리가 나도록 자리에 폭 떨궜다. 감이 없구나. 미채가 등판을 반히 들여다보는 동안 그는 다시 완완하게 수그러졌다. 미채에게 마주하려 고개를 틀었다. 배면을 댄 몸자세로는 거기까지 닿진 않았다. 뒤뜬 시선이 어중간에 머물렀다. 방에선 눈을 매어둘 만한 흠이 보이지 않았다. 미채가 약을 구해오겠다며 일어섰다. 그대로 두면 안 돼. 영윤은 벽에 등을 붙이고 돌아 앉았다. 너무 늦었어. 미채는 멈춰섰다. 선뜻 표정을 정하지 못 하다가 선웃음이 나왔다. 우리 곧 성인이야.
  그리곤 그길로 문 잠금을 풀고 나갔다. 닫힌 문의 울림과 사늘한 풍압이 들이쳤다. 영윤은 모른 새에 몸을 떨었다. 방 째로 뒤흔들린 것 같았다. 따라 나서려 자리를 떼다가 도로 내려앉았다. 그는 눈을 좁게 모아 문을 바라다봤다. 한숨을 풀랬더니 기침이 났다. 목에 헛힘이 들어있었다. 귀가 웅웅댔다. 그는 시선을 돌려 벽면을 훑었다. 뒤편에 매설된 무언가, 배관이며 난방기 같은 것들을 짐작하면서. 정말로 무언가 울고 있는지 몰랐다. 미채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시내까지 왕복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영윤은 그동안 헤아린 속시계에 소용을 잃고 배게에 머리를 놨다. 신발장에 베이스 기타가 기대 세워져 있었다. 밀밀히 꾸며 붙인 굿즈 스티커들이 부옇게 닳았다. 어쨌건 미채는 저걸 여기 두고 나갔다. 기분을 거슬러 눈을 감았다. 미채가 돌아올 때까지 잠기운은 들지 않았다. 미채는 노크를 하다 끊고 벨을 눌렀다. 영윤은 문을 열어주기 앞서 뜸을 들였다. 누구시냐고 일단 물어봤다.
  미채는 약을 구하지 못했다. 네 말대로, 너무 늦었더라고. 미채는 어지간히 안으로 들지 않았다. 언저리에 서서 오도카니 영윤을 쳐다봤다. 영윤은 그 눈초리가 제 몸을 비껴나 너머를 전망하는 것 같았다. 그의 뒤엔 창문이 터 있었다. 그는 거기를 돌아 살펴봤다. 그저 어두워서 흐렸다. 그럴 시간이었고 별건 없었다. 영윤이 타일렀다. 괜찮다고, 나는 문제없다고.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엎드려 눕는 게 나을 거라 미채가 도움말했다. 등이 닿아 눌리면 상처가 덧날 수도 있겠다는 거였다. 영윤은 뒤를 내놓고 돌아 누웠다. 앞판이 눌려 외려 거북했다. 이부자리를 품에 도도록히 뭉쳐 안았다. 어디까지 나갔었는지 미채에게 물었다. 나 때문에, 박자 없이 말끝을 달았다. 미채는 밤늦어서 자괴하지 말라고, 그거 꿈에 안 좋다고 일렀다. 어차피 영윤은 밤결에 끈질긴 불면이었다. 영윤은 미채가 먼저 잠드는 걸 봤다.
  깨어났을 때 등이 뜨끔거려 군시러웠다. 목에 익지 않은 공기가 들었다. 그는 팔을 어깨 뒤로 넘겨 허우적였다. 살 위를 깔끄러이 문지르는 게 있었다. 덜 된 잠이 몸소름에 활짝 깼다. 바닥을 짚고 밀며 몸을 들었다. 목이 평소보다 가벼워져 움직임이 경솔했다. 이불이 들춰나며 쌓여있던 것들이 털려 날렸다. 이불과 배겟잇에 새카만 다발이 흩어져있었다. 그는 귓등 뒤의 높은 목을 감쌌다. 머리가 잘렸다.
  그는 욕실로 가 거울 앞에 섰다. 뒷목으로 내려오던 머리 줄기가 사라졌다. 그게 전부였다. 다른 데는 온전했다. 숱을 넘겨대며 확인했다. 뒷머리만이 깎여나갔다. 끊긴 머리칼이 어깨 위에 묻었다. 긴 가닥으로 끊겼다. 뼘으로 재볼 수 있을 정도였다. 여러 번 대지 않고 한 질로 자른 모양이었다. 미채가. 그는 신발장을 확인했다. 베이스 기타가 사라졌다. 영윤은 욕실로 돌아갔다. 고개를 내저어 머리 부스러기를 떨쳤다. 더디게 걸어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한 차례 여닫아 재차 다지듯 잠갔다.
  미용실부터 가봐. 미채는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말머리를 돋치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해놨으니까. 그대로 둘 건 아니잖아. 대답 달 틈도 없이 별안간 전화가 끊겼다. 미처 귀밑에 머무르던 전화가 알람을 울렸다. 송금이 들어왔다. 입금자명이 ‘이발비’로 돼있다. 마냥 이발비라기엔 넘치는 액수였다. 그는 다시 욕실 거울을 찾아 살폈다. 뒤를 비추면서 또 앞을 기엔 시야 폭이 닿지 않았다. 품이 퍼진 후드티로 갈아입고 모자를 뒤집어 썼다. 볼캡을 더 끼워 썼다. 추위를 신경써가며 마저 갖춰 입었다. 방을 나서려 할 때에야 한번 밖을 둘러봤다. 밤사이 쌓였던 눈을 지금 알아챘다.
  미채의 소셜 미디어 계정이 비워졌다. 오복소복했던 게시글들이 남김없이 지워졌다. 한 줄 소개 밑에 비고된 가입 년도에 눈이 갔다. 육 년 전, 중학생 때부터였다. 어제만 해도 살아있던 계정이었다. 하룻밤 새에 정리됐다. 자동 삭제 프로그램을 쓴 모양이었다. 가명을 내걸어 오프라인 관계망으로부터 가름 두고 운영하던 계정이었다. 사정이 바뀌어 더는 머무를 수 없게 됐습니다. 전송처럼 인사말을 갱신해놓았다. 오늘 아침에 막 올린 거였다. 댓말을 달지 못하도록 막혀있었다. 계정에 관해 열람할 수 있는 것들을 낱장 같이 뒤졌다. 미채는 어디까지 폐기했고 무엇을 남겨두었는지. 그 가망은 얼마 못 가 고갈났다. 접어버린 블로그 페이지엔 증거 삼을 만한 것이라곤 드러나지 않았다. 미채와 엮여 맺어진 사람들끼리 서로 행방을 찾아 묻고 있었다. 대답다운 소식은 없었다. 화제는 동요를 나누는 수위에 머물렀다.
  영윤에게도 들어온 수소문이 있었다. 무슨 일 있냐는 문장으로. 내부 메신저의 문자였다. 노아한테서 온 거였다. 영윤은 그를 노아라고 불렀다. 그의 대화명이었다. 당초 노아의 계정은 성가 밴드 연습 영상을 게시하던 데였고, 거기에 제 세례명을 가져다 쓴 거였다. 성씨는 기억하지 못했다. 거기까지 내놓아 호명해야 할 만한 일이 없었다. 키패드 위에서 입력창이 끔벅였다. 영윤은 엄지를 오물댔다. 그러다 답장 않고 전화를 걸었다. 약속대로 모이긴 그른 것 같다고 전했다. 노아는 잠잠히 납득했다. 미채 없이라도 만나겠는지 노아가 물었다. 어차피 약속을 위해 비운 셈인 시간이었다. 가겠다고 했다. 원래 정해뒀던 시간대로 느직이 오라 했다. 그 전까진 성당 일이 있댔다. 영윤은 곧장 역으로 갔다. 두 장 받아둔 표를 한 장은 취소했다.
 
  노아의 손품이 벅찼다. 기타를 두 대 지고 있었다. 영윤은 마중하려다가 정문 앞에서 멎어섰다. 노아는 굽지 않고 걸었다. 넘치는 기타 한 대를 맞들어주겠다는 것도 마다했다. 묻자니 여분 한 대는 오늘 막 받은 새 거였다. 밴드를 감독하는 청년부 신부가 선물했댔다. 곧 졸업이고 성년인 기념이었다. 오늘로 올해 마지막 주일이었다. 등진 방향에서 단중한 소리가 울렸다. 종명. 영윤은 그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성당을 돌아봤다. 식어버린 연말 장식이 첨탑에 감겨있었다. 노아가 성당 때종이라 알려줬다. 종소리는 느리게 퍼져 오랫동안 울렁였다. 영윤은 모자를 당겨 머리에 덧굳혔다. 그럼, 이제 끝나는 거야? 노아는 아니라고 했다. 이건 저녁 미사를 시작할 때 치는 종이라고 했다. 영윤은 거듭 성당 방향을 돌이켰다. 노아가 빠듯한 팔로 영윤의 덮는 모자를 재차 여몄다. 영윤을더러 춥겠다며 다시 걸음을 끌었다. 정류소까지 걷는 데에 종이 계속 쳤다.
  노아는 영윤을 방으로 맞았다. 집은 비었다. 다른 가족들은 미사를 마치고서야 늦게 귀가할 것이었다. 그들은 겉옷을 풀어두고 앉았다. 데스크탑이 따뜻한 환풍을 내뿜었다. 화면만 내려간 채 내내 돌아가고 있었다. 노아가 문득 주의를 내며 그리로 갔다. 그가 손을 대자마자 화면이 살아났다. 영윤도 화면 가까이 몸을 내밀었다. 카메라에 찍어둔 합주 영상들을 꺼내 옮기는 중이었다. 원래엔 미채가 커뮤니티에 게시해뒀던 것들이 오늘 아침 지워졌다. 촬영기를 갖고 있는 노아가 원본을 건져내고 있는 거였다. 중학교 때부터 매년 연말마다 찍어서 다섯 개였다. 파일명은 그때의 학년을 몫몫이 매겼다. 마침 셋이 서로 동년이었다. 각 회차를 뾰족히 구별 지어 부를 명색이 달리 없기도 했다. 매해 같은 사람들이 모여 같은 곡을 연주했다. 팬 세 명이서, 그 밴드의 1집 앨범에 실린 전곡을. 셋만으로는 밴드를 커버할 구성이 차지 않았다. 나머지는 가상 악기 반주로 메꿨다. 순전하게 팬 커버 연주였다. 일부러 품 팔아 사람을 돌라맞출 필요는 없었다. 자연히 공명해 뭉친 인원들끼리 해내기로 했다.
  겨울방학 중 하루에 시간을 맞춰 연습실을 빌렸다. 앨범의 러닝타임은 열한 곡을 죽 이어 가서 사십 삼 분 남짓이었다. 첫해엔 끊김 없도록 연주를 완성하는 데에 몇 시간을 들였다. 덜 된 솜씨에 열약한 촬영으로 궁티가 났다. 촬영본을 보면 못내 감질이 맺혔다. 다음에 다시 하자는 볼멘 제안이 그 자리에서 나왔다. 후일을 두다가 이듬해에야 다시 모였다. 재차 찍어 올린 영상부턴 호응이 올랐다. 그 밴드의 팬덤에서 알음 돌려보면서 가만하게 퍼졌다. 이전번 영상까지 역급으로 조회가 늘었다. 내년 연말 그맘때가 되자 언지가 흘렀다. 연습실을 두 차례 맡아 구했던 노아가 꺼내 말했다. 올해에도 하겠는지. 기분이 동해 쉬이 모였다. 고등학교 때부턴 계기 없이 관성대로 약속을 꾸렸다. 회차를 지낼수록 합주 동참을 묻는 사람도 있었는데 더 끼우지 않았다.
  노아가 앉음새를 풀었다. 그리고 없던 웃음을 지었다. 이제서야 안 건데, 그가 영상을 틀며 말했다, 너 지금까지 실수했더라. 재생된 건 맨 첫째 해의 연주였다. 커서를 당겨 장면을 끄트머리로 옮겼다. 앨범 수록곡 중 마지막 트랙이었다. 맑은 종성이 잇따라 울렸다. 인트로였다. 성천탈력. 영윤의 입에서 노래의 이름을 외웠다. 그는 영상의 자신에게 꼴똘해졌다. 영윤은 높닿은 스탠드 마이크를 자기 쪽으로 굽히고 있었다. 십 초 남짓한 전주 동안 박자에 순응하려 목을 끄덕였다. 퍼커션이 아니라 종소리 효과음에 맞췄다. 그는 곧 첫 마디를 부른다.
  아침이다, 어제의, 공백을 채워야지
  노아가 여기라며 주의를 거뒀다. 영윤은 감이 짚히는 데가 없었다. 노아는 가사라고 알려줬다. 영윤이 가사를 헷갈린 거였다. 원래 가사에 쓰인 단어는 공복이었다. 공백이 아니라. 영윤은 언뜻댔다. 어긋난 두 단어를 뇌어보며 발음을 곱씹었다. 공복이구나. 선선히 소감을 뽑아 말했다. 노아는 영윤의 낯색을 살피며 피시식했다. 확인해보길 이다음 연주할 때에도 매양 공백이라고 그랬댔다. 다시 재생을 돌렸다. 영윤이 노랫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정말이지, 의욕이 들지 않아요….
  그들은 연주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노랫말은 끝에 가서 첫 소절을 반복했다. 거기서도 영윤은 어김없이 “공백을 채워야지”라고 했다. 그리고 아웃트로로 빠졌다. 가상 악기로 합성한 구형파가 갈피갈피 윤슬처럼 번뜩이다 점점 꺼져갔다. 마지막 곡을 마치고 다들 태도를 누그렸다. 미채는 기지개를 핀 채 신선히 군걸음하며 화면 틀 밖으로 나갔다. 노아는 기타를 내려두고 카메라를 추스르러 가까이 다가왔다. 그대로 화면은 멈추고 영상이 끝났다. 영윤이 비껴보였다. 그는 주저앉아 있었다.
  영상들을 도로 올려놓을 테냐고 물었다. 노아는 일단 부인했다. 고개를 천천히 틀어 내저으며 대답할 말을 모았다. 미채도 당사자였다. 미채는 내놓지 않겠다고 마음 정한 걸 없는 셈으로 만들지는 말자고. 영상 파일을 살리는 건 영윤을 위해서였다. 영윤은 그걸 갖지 못했으니까. 영윤은 영상들을 다시 게시했으면 한다고 울러냈다. 미채에게 물어 대답을 받아보겠다고 뒤를 다져 밝혔다. 노아가 되잡아물었다. 너는 그 애랑 연락이 붙어있었느냐고. 그건 아니었다. 전화했을 때에 이쪽 말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그건 아닌데, 얼굴 대러 찾아가볼 작정이었다. 찾아갈 거처는 아는지 묻는 걸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너도 모르는구나고 대받았다. 뭉뚱히 지역을 들은 기억만 있고 세세한 주소는 무중이었다. 노아가 덧얹었다. 냉큼 찾지 않았다간 미채는 곧 집에 가만 머무르지도 않을 터라는 얘기였다. 미채는 졸업식만 치르면 새해부터 어디에든 떠나리라 계획했었다. 미채가 그렇게 써 올린 글을 영윤도 읽은 적 있었다. 그는 거기에 댓말을 달아, 그건 여행이냐고 물었었다. 미채는 정해진 건 없다고 그랬다.
  미채는 이미 졸업을 했나. 미채는 원체부터 팬 계정에선 사삿일을 꺼내지 않았다. 영윤도 노아도 들은 바가 없었다. 영윤이 말맥을 틀었다. 너희 학교는 벌써 치뤘지. 노아는 그렇다고 했다. 바로 며칠 전에 소식을 부렸던 참이었다. 노아가 그대로 넘겨 물었다. 졸업에 대해. 영윤은 아직이었다. 그럼 언제인지를 덧물었다. 영윤의 빈속이 끓었다. 소리도 났다. 평형감이 일시 실그러지느라 잠시 할말을 헤맸다. 영윤은 전화기를 가눠 들어 일정을 확인했다. 졸업식은 12월 31일 칸에 표시났다. 내일이었다. 내일이라고 답했다.
  노아가 저녁을 차리려 일어났다. 당장 만들 거리가 없어 나가서 사와야 했다. 그는 나가기 전에 계란을 꺼내 냄비를 올렸다. 사와서 만들어 차리려면 한참일 테니까, 대강 삶아서 그걸로 허기만 달래고 있으랬다. 센 불을 받는 물은 금세 끓었다. 영윤은 불 앞에 서서 냄비 안을 줄곧 들여다봤다. 끓는 기포에 뒤채는 계란이 바닥을 계속 달캉였다. 얼마 안 있어 땀기가 돋았다. 그는 이쯤이면 됐을 거라 느꼈다. 찬물을 받아놓고 냄비 째로 쏟아부었다. 증기가 피었다. 붙잡은 계란은 물에서 꺼내자마자 뜨거워졌다. 개수대 모서리에 계란을 찍었다. 금을 낸 껍질을 마저 드러내나갔다. 그건 갑자기 굳기를 잃고 무너져내렸다. 말갛게 뭉친 내용물이 손 안에 쏟아졌다. 손가락에 엉긴 덩어리가 실없이 끊겨 바닥으로 탈싹 탈싹 흘렀다. 보얗고 노란 얼룩이 늘어갔다. 영윤은 방금 찰나에 자기가 비명 냈던 말을 곱씹었다. 뜨거, 라고. 범벅된 손을 싸쥐어봤다. 미지근했다. 영윤은 치운 걸 욕실에다 흘려보냈다.
  묵고 가겠느냐고 노아가 물었다. 영윤은 첫마디부터 절절댔다. 창밖의 눈바람에 틈틈이 시선을 팔렸다. 그래도 될지 하며 결정을 넘겼다. 나는 괜찮은데, 참, 노아가 상 위에 깍짓손을 틀었다, 네가 안 되겠네. 내일이 졸업식이랬지. 영윤은 입을 가렸다. 목 아래 격막에서 압이 치밀었다. 갈 거지. 노아가 물었다. 영윤은 입시를 끝낸 학기말부턴 계속 등교하지 않았다. 노아도 들어 알고 있었다. 영윤은 응, 한 번 고개를 내렸다. 가야 될 것 같아.
  영윤은 인사하고 나오려다가 문지방에서 돌아섰다. 물어볼 게 있었다. 모자를 끌르고 벗었다. 설된 머리가 부산히 드러나왔다. 노아에게 이려 그대로 등을 돌아보였다. 노아는 입이 먼저 터 나왔는데 애써 잠자코 있으려는 눈치였다. 영윤이 물었다. 흉하게 돼있냐고. 노아는 떠듬대던 말부리를 군기침으로 다져 넣었다. 그는 덜 굳은 단어들을 이러저러다 끝내 민망하다, 고 정리했다. 네가 장발이 아닌 건 처음 봐서 그렇다며 이어 말했다. 영윤은 모자를 되돌리면서, 나도 몇 년만이라고, 선선히 맞장구했다. 노아는 ‘졸업식’이라 말을 냈다가 도로 집어 넣었다. 늦었나. 지금 미용실 가기엔. 그는 입 주변에 뜬 공기를 마저 문질렀다. 두 사람은 각자 시간을 살폈다. 늦은 것 같아.
  영윤은 올 때보다 비싸게 찻삯을 치뤘다. 제 집에 닿아있는 역보다 한 정거장 먼 역에 갈 거였다. 그는 미채가 사는 곳으로 갔다.
 
  영윤은 자지 못했다. 그나마 쉬다가 아침에 나섰다. 이 도시의 모든 고등학교를 찾아 목록으로 정리했다. 다해도 손으로 셀 수 있는 숫자였다. 몇 군데는 졸업이며 종업을 진작 지내고서 방학 중이었다. 모든 학교의 행정실에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삼 학년에 미채라는 학생 있죠. 확인받듯 떠 물었다. 있다, 없다, 알려줄 수 없다고 답하는 곳도 간혹 있었다. 회답만 따내고선 더 잇지 않고 끊었다. 답변 내용을 부록했다. 없음을 확답한 곳은 소거했다. 미채라는 이름인 학생이 있으면서 아직 학기중인 학교가 있었다. 지금 있는 데서 가까웠다. 등교 시간까지 맞춰 갈 수 있었다.
  책가방들이 같은 방향으로 한결같이 걸었다. 영윤은 지도를 치우고 그 발길에 묻어갔다. 곧 교문에 닿았다. 경사가 선 입구였다. 영윤은 비탈에서 비껴 섰다. 교사 한 명이 문기둥 옆을 지키며 등교 감독을 봤다. 그가 영윤을 찔러 가리켰다. 모자는 너무하댔다. 옷차림새 지적이었다. 저는. 영윤은 우선 대받고서 할 말을 생각했다. 말이 동뜨자 감독 교사가 몇 걸음 가까이 왔다. 저는 학생이 아닌데. 교사는 꾸며 놀란 기색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교문으로 돌아갔다. 영윤은 먼 치로 나가 자리잡았다. 거기서 교문 방향을 내다봤다. 벋딛기 지쳐서 차도 울타리에 걸어앉았다. 앞에 흘러가는 사람들을 곁눈으로 흘겼다. 등굣길은 십 몇분 새에 느즈러졌다. 교문 쪽에서 철 끄르는 소리가 났다. 점점이 지나가던 학생들이 속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종 친다. 감독 교사가 소리쳤다. 영윤은 붙박던 주목을 그쳐 몸을 풀었다. 눈자위가 아팠다.
  그 교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물어왔다. 영윤은 느리고 흐리게 생각하다, 길을 잃었다고 내뱉었다. 그러면 어딜 가려는지 캐고 들었다. 영윤은 떠오르는 장소마다 궁색스러웠다. 실은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쓸었다. 마냥 밖에 서있으면서 붓기가 올라있었다. 알아서, 알아서 하고 있어요.
  머리는 고쳤어? 미채가 전화를 걸었다. 정오가 되기 전이었다. 아침에 누가 대뜸 자길 찾았다고 학교에서 전달했댔다. 내 학교는 어떻게 알았어. 말해준 적 없을 텐데. 영윤은 본말을 고했다. 몰랐다, 지금도 모른다. 전화에 바람 소리가 끼어들었다. 미채가 귀에서 송화기를 틈 둔 듯했다. 희한하게 구네, 직접 연락하면 될걸. 영윤은 반 발짝 튀어나갔다. 응하지 않을 게 뻔했다, 왜냐하면 너는 도망쳤으니까. 미채가 웃음을 치며 말 꺼낼 박자를 벼렸다. 꼭 그게 아니라, 네가 놓친 거겠지.
  너는 이미 졸업했어?
  떠날까봐 그래?
  맞아.
  오늘 뜰 거야.
  새해부터 가겠다면서.
  맞아. 자정 넘겨서, 내일 해가 바뀌자마자.
  지금 어딨어.
  이따 배웅 와. 터미널로. 자정 되기 전에.
  영윤은 온 길을 되짚어 밤을 지냈던 곳으로 돌아갔다. 각방 좌석이 마련된 찻집이었다. 같은 자리가 비어있길래 다시 골라 들어앉았다. 점원은 바뀌어 있었다. 단것을 시키고서 후회했다. 그는 자리에 맞춰 누웠다. 마음만 먹으면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좀처럼 잠이 안 왔다. 놓친 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일어났을 때엔 내버려둔 음료의 얼음이 전부 녹았다. 잔 바깥에 맺힌 물이 밑동 둘레에 고였다. 목이 시근했다. 잘못 누운 것 같았다.
  대중 잡아 미리 나온 셈이었는데 이미 미채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기척을 주기 전에 미채 쪽에서 알아챘다. 미채가 대번 얼굴을 가리켰다. 기어이 다시 기르겠구나. 머리를 가리키는 거였다. 영윤의 머리에 허전감 갑작스레 와닿았다. 몸 누일 때에 벗어던 모자를 잊어 두고 온 거였다. 웃옷에 붙은 후드를 그나마 덮어썼다. 미채는 베이스 가방을 지고 나왔다. 겨울 옷의 부푼 몸가짐이 죄어 보였다. 여행 동안 치면서 다니느려냐고 물었다. 미채는 도리 저었다. 이제 이건 안 친댔다. 적당한 가게가 보이면 팔아치우려 갖고 온 거였다. 가방이 외투 겹을 비껴내며 흐르려 했다. 목이 긴 베이스 기타가 얹혀져 무게 중심이 높은 데에 맺혔다. 미채는 어깨를 내둘러가며 자꾸만 고쳐 멨다. 그들은 대기 의자로 가 앉았다. 가방 내리는 걸 영윤이 받아줬다. 받는 팔이 틀어져 베이스를 바닥에 찧었다. 그가 어림했던 팔힘으론 모자랐다. 아. 미채는 올칵 북받친 소리를 냈다. 영윤은 부딪은 데를 살피느라 얼굴도 맞추지 않고 연발 사과했다. 미채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정색을 금세 풀어 내렸다. 미채는 아니라며 부인했고 괜찮다며 사양했다. 영윤은 황망히 가방 지퍼를 열어 안쪽을 확인했다. 베이스의 몸이 드러났다. 미채를 흘낏했다. 몸체에 살뜰히 붙었던 스티커들이 벗겨져 있었다. 벗긴 자국이 잔상처로 싱겁게 남았다. 그만 둔댔지. 베이스를 도로 닫아 넣었다. 그만 둘 때도 됐잖아. 미채가 닫힌 가방 덮개에 손을 포갰다. 영윤은 뭐라 잇지 못했다.
  발차 때가 임박해 바깥 플랫폼으로 나섰다. 쌓이지 못한 눈이 녹아 바닥이 잘박였다. 미채가 번호판에 매겨진 행선지를 확인해가며 플랫폼을 찾았다. 영윤도 같이 눈으로 쫓았다.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도착한 버스의 앞유리에 그 지명이 명찰처럼 나붙어있었다. 기사가 짐을 받으러 나왔다. 미채가 그리로 베이스 가방을 넘겼다. 나는 갈게. 영윤은 맞인사를 떠올릴 동안 따라붙다가 탑승구 바로 앞까지 배웅했다. 미채가 표를 내밀었다. 기사는 손짓해 여기에 찍으라 안내했다. 기계가 표를 받았다. 청소년입니다. 접수 음성이 흘러나왔다. 미채는 입구에서 들어가지 못한 채 멈췄다. 저는. 거기서 말을 멨다. 기사가 재촉해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저는. 미채는 꾸벅꾸벅 같은 말을 오물거렸다. 뒤편에서 종소리가 났다. 방송에서 제야 타종식을 중계하는 중이었다. 끝났군. 티비 가까이에 앉은 노인이 혼잣소리를 했다. 종은 계속 쳤다. 같은 무게의 소리를 담담한 박자로 이어갔다. 영윤은 모두 듣고 있었다.

  영윤은 탑승구 계단에 발을 디뎠다. 얘는. 미채의 손목을 낚아 당겼다. 미채가 돌아봤다. 눈이 벙벙히 벌어져 있었다. 꼭 자신을 보는 눈길이 아닌 것 같았다. 너머의 기사도 이쪽을 넘어다봤다. 눈시울을 추키며 시선을 불궈 냈다. 먼 곳을 넘겨보려는 듯이. 누군데요? 기사가 추궁했다. 미채의 표정이 이지러졌다. 영윤은 등 뒤가 스멀거렸다. 저희는, 저는…. 하지만 배후는 이미 지나온 곳일 뿐이었다. 그는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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