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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과거 복고는 어디로도 복귀하지 않는다.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 복고는 실현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노스탤지어는 불가능한 감정이다. 노스탤지어는 유아동기의 눈먼 성적 충동과 닮았다. 복고주의는 실현할 수 없는 대상을 무한정 집착적으로 욕망하며 과열에 빠진다. 노스탤지어와 유아기는 모든 이가 보편히 겪는다는 점에서도 같다. 우리는 모두 노스탤지어 열병을 앓고 있다. 뉴진스의 의 뮤직비디오는 노스탤지어 정서를 부추긴다. 학창 시절이며 방학을 표상하는 정경과 VHS를 모사하는 화면 질감은 과거를 가장한다. 타이틀 , 옮겨 말해 풍선껌은 Y2K 스타일의 주된 소품이다. 그리하여 이 뮤직비디오는 아득하고 찬란했던 유년 시절을 그린다. 우리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것이 되기를 원..
날개는 멎지 않고 환상통을 부른다 양서토 - 2024.05.31.    그건 가짜 같았다. 레이무는 아치교 꼭대기에 서 있는 새 장식에 눈이 마주쳤다. 그걸 새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는 확신이 없었다. 날개는 새의 것이었지만 그 밖의 얼굴이며 몸이 꼭 사람 꼴이었다. 아치 꼭대기가 높아 분명히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날아서 다리 위로 올라갔다. 장식을 향해 가까이 다가섰다. 그것에 손을 대보려 했다. 그러자 새 장식은 날갯짓을 치며 달아나 버렸다. 진짜였구나. 그녀는 새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밑에서 레이무를 부르고 있었다. 되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이모에게 돌아가 자기가 본 것에 대해 물었다. 세상에 그런 새는 없었다. 환상을 본 거라고 이모는 단언했다. 레이무는 정말로 봤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보여드리면 믿으시겠죠. 그녀는 다시 새..
어느 날 카프카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내 생각엔 ‘카프카’라는 단어는 일반 명사로 재정의 될 수도 있다. ‘카프카’는 어느 20세기 독일어 작가의 이름을 지시하는 것 이상의 용례를 가진다. ‘카프카적(kafkaesque)’이라는 형용사의 해설을 살펴보면 명료하다. 그것은 ‘프란츠 카프카에 관련된’이라는 의미다. 어느 대상이 단순히 카프카와 엮였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엔 형용 될 만한 성질이 있다고 여겨진다. (어떤 명사건 이같은 방식으로 형용사화 될 수는 있겠으나, ‘카프카적’의 경우엔 그러한 용법이 사전 등에 의해 합의되고 공인받은 데에 반해, 그렇지 못한 여타 허다한 사례들은 임의적이고 소모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카프카는 특징적이며 옮기 쉽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비유되며 인용되곤 하는 열린 개념이다.    무엇이 카프카적일 수 ..
유인 이하루 - 2024.05.07.    어디로 가냐고 한주가 물었다. 앞서가던 미채는 조촘 걸음을 그쳤다. 악기 가방이 덜컥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높은 가방이 옆얼굴을 온통 가렸다. 한주는 미채를 지나쳐 앞으로 돌아갔다. 미채는 고개 돌린 그대로 뒤편에 마냥 곁눈을 뒀다. 모르겠다, 이사라고만 들었을 뿐, 미채는 더이상은 알지 못했다. 미채가 슬몃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불퉁한 길 위에서 걸음새가 기우뚱댔다. 한주의 옆을 가직히 지나쳐 갔다. 비켜 나온 길 멀리에서 사람이 오고 있었다. 한주는 입을 우므렸다.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그는 금방 미채를 뒤쫓았다. 등 뒤에서 미채를 잡았다. 가방을 붙당겼다. 미채의 어깨선이 단박에 비뚜로 쏠렸다. 가방이 치우치는 대로 미채는 쉬이 기울었다. 한주는 눈을..
내일이 뭐였으면 오늘이 이하루 - 2024.03.05. 며칠 뒤, 가구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우리만 먼저 도착했다. 실수였다. 그건 오늘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였다. 가구는 며칠 뒤에나 들어올 거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오늘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지. 우련이 맞장구를 쳤다. 우련은 늘 성인이 되면 집을 구하리라며 입다짐을 부려왔고 정말 그렇게 했다. 그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욕실부터 살폈다. 나도 뒤따라 어깨너머로 들여다봤다. 그는 문턱 밖에 서서 안을 건너다봤다. 욕조가 있었다. 이 집엔 욕조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고 나는 말했다. 우련이 내게로 기우듬히 고개 돌렸다. 그대로 골똘하다가 반문했다. 욕조는 원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내가 욕실로 들어섰다. 열어둔 문가에서 우련은 기어코..
바나나는 하나의 바게트가 되고 싶었어 양서토 - 2023.11.28. 나는 멋쟁이 바나나. 내 꿈은 바나나 바게트가 되는 거였어. 중학교 시절, 옆 반에 바게트가 있었어. 그것도 멋진 바게트가. 그 애는 따끈하고 밀의 냄새가 났어. 녹말이 많은 사람들은 대개 그래. 모두와 잘 어울리고 어울리는 사람까지 돋나 보이게 하지. 나는 그 애를 찾아가서 말했어. 나는 바나나 바게트가 되고 싶다고. 나와 함께 해달라고. 그 애는 놀랐던 것 같아. 쩌적, 크러스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지. 그리곤 대답도 해주지 않고서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어. 다음날에 나는 선생님에게 불려 가게 됐어. 거기서 선생님이 대신 대답을 해주더군. “너는 바나나야. 걔는 바게트고. 바나나거나 바게트거나 둘 중 하나야. 바나나 바게트가 될 수는 없어.” 그렇지만 나는 무화과 바게트..
하향 이하루 - 2023.10.03.    백지에게 개가 있었다. 미채는 뚝 멎어섰다. 개가 미채를 둘레 돌면서 낯선 살냄새를 살폈다. 코가 무릎께까지 닿았다. 백지가 손등을 저어가며 주둥이를 물러내려 했다. 개는 밀림 없이 미채에게 다가들었다. 손품이 자꾸만 머리 위로 타넘었다. 주인 요령이 없네. 미채가 이죽대자 백지가 안된 눈빛을 보냈다. 미채는 고개를 끄덕했다. 자신을 개가 익힐 때까지 가만 뒀다. 개는 곧 혀를 뺐다. 더운가봐. 백지가 손을 끼어들어 개의 코를 대봤다. 물기가 덜했다. 개가 입주변을 날름 핥아 훔쳤다. 두세 번 만에 자기 코까지 닿았다. 백지가 화채를 해먹자고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미채는 무릎을 쓸어 닦았다.   미채가 거들겠다며 따라붙었다. 칼을 하나 더 꺼내와 달랬다. 둘이 탁자..
드랍 이하루 - 2023.11.15. 옥상에서 너는 그를 마주친다. 마침 네 얼굴은 한창 울면서 진창같이 되어있다. 죽고 싶도록 부끄러웠으므로 이 김에 죽기로 결심한다. 너는 헤까닥 담장 위를 올라타려 몸을 솟군다. 높이가 모자란 바람에 넘어가지 못한다. 뒤편에서 그가 큰소리를 내 너를 불러세운다. 너는 담장 너머를 향해 몸을 재촉한다. 담벽을 붙잡고서 못 미친 발돋움을 칠떡댄다. 그가 너를 붙잡아 떼어낸다. 너는 얕은 뿌리처럼 엉성하고 요란히 뽑혀 나간다. 너와 그는 나란히 바닥을 나뒹군다. 너희는 바닥에 찧인 데를 앓느라 서로 말문이 막힌다. 왜. 그가 먼저 따져 묻는다. 왜 그래. 너는 뭉개 감았던 눈을 뜬다. 그가 널 눈앞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아까 같은 충동이 화끈 차오른다. 너는 계단실을 향해 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