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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과거

  복고는 어디로도 복귀하지 않는다.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 복고는 실현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노스탤지어는 불가능한 감정이다. 노스탤지어는 유아동기의 눈먼 성적 충동과 닮았다. 복고주의는 실현할 수 없는 대상을 무한정 집착적으로 욕망하며 과열에 빠진다. 노스탤지어와 유아기는 모든 이가 보편히 겪는다는 점에서도 같다. 우리는 모두 노스탤지어 열병을 앓고 있다.
 

유튜브에 업로드 된 <Bubble Gum> 뮤직비디오에 달린 상단 코멘트.

 
  뉴진스의 <Bubble Gum>의 뮤직비디오는 노스탤지어 정서를 부추긴다. 학창 시절이며 방학을 표상하는 정경과 VHS를 모사하는 화면 질감은 과거를 가장한다. 타이틀 <Bubble Gum>, 옮겨 말해 풍선껌은 Y2K 스타일의 주된 소품이다. 그리하여 이 뮤직비디오는 아득하고 찬란했던 유년 시절을 그린다. 우리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것이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소비한다. 복고 탐미는 현재 대중문화 전반에 번성하고 있다. “Y2K”는 트렌드이고 “레트로 열풍”은 매체의 강령이 되었다. 과거의 가수가 유령처럼 현재의 방송에 나타나고 현재의 가수는 망령되이 과거의 미학을 수행한다. 대중문화, 대중음악, 즉 팝은 젊은이의 문화다. 팝은 고리타분한 과거를 벗어던지고 현재에 충실하며 더 나은 미래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를 지향하는 대중문화는 반동적이다.
 
  대중문화는 언제부터 향수병에 빠졌는가. 과거 중독은 대중에게서 더 나은 미래의 전망이 사라진 때에 발병했다.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다. 일례, 지난 세기 사람들이 밀레니엄 시대를 향해 부풀렸던 기대는 짜게 배신당했다. 예상보다 부진한 21세기는 여전히 문제투성이고 새로운 문제투성이다. 이제 우리는 미래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발전 없는 미래는 현재와 다른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무미한 연장일 뿐이다. 대중이 미래를 그리길 멈췄기 때문에 대중문화가 그릴 만한 미래상도 없다. 이전의 대중문화는 미래를 이상으로 삼았지만 이제 그런 가능성은 철회됐다. 대중문화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찾아야 했다. 미래가 없는데 어디서? 미래가 불가해진 시간에 남은 것은 과거밖에 없다. 대중문화는 자연히 과거를 이상화하기 시작한다. 대중문화와 대중, 어느 쪽에서 먼저 노스탤지어가 발병했는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이제는 대중문화 또한 대중이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를 잃고 과거에 매달린다.
 
  그러나 과거는 무사한 대안이 될 수 없다. 과거지향은 병적이다. 노스탤지어 감각은 불만족 상태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를 부정한다. 현재를 벗어나 과거에 방문하길 욕망한다. 그 욕망은 불가하다. 노스탤지어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그것은 영원한 결핍이다. 노스탤지어는 우리를 불안한 현재에 정체시킨다. 이 정체 속에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생겨나지 못한다. 우리는 이 정체 속에 기꺼이 빠져드는 중이다.
 
  추억의 광경은 익숙하고 편안하다. 그러나 굳이 되잡아묻겠다. 과거는 정말 편안했나? 당신의 유년기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안락이었나? 우리는 진정 낙원을 가졌었지만 현재에 이르러 내쫓긴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현재가 그렇지 못한 만큼이나 과거 역시 그렇지 못했다. 과거는 현재와 다른 세계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미래가 현재의 연장에 불과하다면, 과거 또한 언젠가의 현재였을 뿐이다.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과거상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노스탤지어 표상을 뒤섞은 가공 이미지다. 항간에선 이를 ‘가짜 노스탤지어’라는 조어로 지적한다. ‘가짜 노스탤지어’ 문화는 과거로부터 이상적인 표상을 끌어와 과거를 과대 대표한다. 과대해진 과거는 현재보다 나아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과거로 편향된다. 우리는 더는 갈 길이 없이 다만 불가능한 과거 앞에 정체된 것 같다.
 
  사이먼 레이놀즈는 그의 레트로 문화 비평에서 이 막다른 시간을 우회할 가능성을 제안한다. 그것은 과거를 다시 쓰는 일이다. 익숙한 과거를 다시 써서 낯선 외국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예로 혼톨로지 음악을 든다. 혼톨로지는 과거 음악의 아날로그 매체에서 수반되었던 음향적 손실을 오늘날 디지털 환경의 음악으로 드러내는 경향의 음악이다. 노이즈의 음향 질감은 얼마쯤 향수를 자극하는 동시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으스스한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같은 양가적인 심상으로서 익숙한 과거가 낯선 것으로 변모한다.
 

Aesthetics Wiki(미학 위키)의 Dreamcore 문서 페이지. https://aesthetics.fandom.com/wiki/Dreamcore#Soundtracks

 
  여기 낯선 과거를 초래하는 또 하나의 대안적인 미학이 있다. ‘위어드 코어’ 혹은 ‘드림 코어’, ‘트라우마 코어’ 등 합의되지 않은 채 산만한 이름들로 불리는 일련의 인터넷 문화 장르들과 그 교집합이다. 이들은 익숙한 유년기 심상을 재현하는 한편 각각 위화감, 소외감, 두려움 등의 감각을 부각시킨다. 그럼으로써 과거는 편안한 유토피아가 아니었음을 환기한다. 어렸을 적 우리는 멋모르고 길을 잃었고 늦은 시간 텔레비전은 끔찍하도록 지루했으며 부모와 교사에게 벌을 받을 수도 있었고 이 모든 것에 쉽게 겁먹었다. 그런 사실들이 새롭지는 않음에도 감상자는 충격을 받는다. 우리에게 스며든 이상화된 과거 편향을 과거의 민낯이 교란하기 때문이다. 위어드 코어는 과거를 낯설게 해 마비되었던 감각을 폭로하듯 자극한다. 여기 있는 과거는 더 이상 편안함을 주는 이상향이 아니라, 대체로 허전하며 때로는 불쾌한 낯선 장소다.
 
  우리는 이런 과거라도 돌아가고 싶은가? 잘 모르겠다. 낯선 노스탤지어는 매혹적이면서도 두렵다는, 모순된 파토스를 안긴다. 혼란스럽다 해도 문제없다. 어차피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잃은 와중 과거도 불가능함을 깨달은 우리는 영원히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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