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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카프카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내 생각엔 카프카라는 단어는 일반 명사로 재정의 될 수도 있다. ‘카프카는 어느 20세기 독일어 작가의 이름을 지시하는 것 이상의 용례를 가진다. ‘카프카적(kafkaesque)’이라는 형용사의 해설을 살펴보면 명료하다. 그것은 프란츠 카프카에 관련된이라는 의미다. 어느 대상이 단순히 카프카와 엮였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엔 형용 될 만한 성질이 있다고 여겨진다. (어떤 명사건 이같은 방식으로 형용사화 될 수는 있겠으나, ‘카프카적의 경우엔 그러한 용법이 사전 등에 의해 합의되고 공인받은 데에 반해, 그렇지 못한 여타 허다한 사례들은 임의적이고 소모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카프카는 특징적이며 옮기 쉽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비유되며 인용되곤 하는 열린 개념이다.

 

영화 <오징어와 고래> 中. 직후 "카프카가 썼으나까."라는 대꾸가 이어진다.

 

  무엇이 카프카적일 수 있는가. 무엇보다 카프카의 작품이 카프카적이다. 카프카를 초견한 독자가 <변신>을 읽은 감상을 이야기한다. 이미 카프카와 익숙한 다른 독자는 그가 들려준 감상에 동의하면서 다만 카프카적이라고만 갈음한다. 카프카가 초견인 사람은 카프카적이라는 표현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그는 카프카가 쓴 작품이니 당연하지 않으냐고 되묻는다. 위는 영화 <오징어와 고래>에서 연출된 만담이다. 위 만담은 카프카적카프카의 순환 관계를 지적한다. ‘카프카적이라는 말은 카프카와 그의 작품을 형용하는 데에는 거의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형용 수식은 동어반복적이다. ‘카프카적인 성질이, 즉 카프카와 관련되었다는 성질이 카프카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면 카프카적이라는 어휘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카프카는 실존인물 카프카를 초과한다. 카프카는 카프카적이되 이는 무의미하다. 카프카 아닌 것이 카프카와 관련지어질 될 때라야 카프카는 유의미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가? 카프카가 아닌 것이 어떻게 카프카적일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실제로 카프카라는 말을 그렇게 쓴다. 예술 영화의 거북한 뒷맛이 카프카적이다. 블랙 코미디의 아리송함이 카프카적이다. 수원역의 부조리한 구조가 카프카적이다. 나의 현기증과 악몽이 카프카적이다. 이 모든 것을 실존인물 카프카와 관련짓기는 어렵다. 이들은 카프카 작품의 분위기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카프카적일 수 있다. 건조한 관료적 태도, 모순으로 담지되는 진실, 미로 같은 낯섦 등이 카프카 작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질을 지닌 대상이 곧 카프카적인 것은 아니다. ‘카프카적이라는 표현은 선재하는 성질을 일컫는 방식으로 쓰이지 않는다. 그 표현은 썩 다르게 작동한다. ‘카프카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선 우선 카프카 작품 세계의 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그 심상에 동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카프카적이 된다. 즉 카프카적인 것은 대상에게서 카프카적 성분을 발견한다기보단, 오히려 카프카의 심상에 대상이 대입되는 방식으로 인식된다. 가령 건조한 태도로 모순을 이야기하는 한편 얼마쯤은 진실을 암시하는 관료주의적 악몽이라는, 분석되는 성질들마다 수사적으로 카프카 작품의 그것과 숱하게 일치하는 어떤 대상이 있다 한들 그것이 실상 카프카의 작품에 나올 법하지 않다면 이를 카프카적이라고 표현하기는 적절하지 않다.

 

  대상을 카프카에 비길 때에, 카프카는 물론 비유의 보조관념이다. 그러나 실상 발화의 태도는 카프카를 원관념처럼 대한다. 무엇인가를 카프카에 비유할 때에 실제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카프카. ‘카프카적이라는 말을 하는 화자는 카프카에게 더 관심이 있다. 표현 대상을 배려하는 화자는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자아가 강하고 투사가 빈번한 자들만이 카프카를 입에 올린다. ‘카프카를 좋아한다는 것은 다른 작가를 좋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카프카의 세계는 불친절한 전언과 동시에 단순명료한 감각을 갖고 있다. 갑충으로의 변신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치 않으나 그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은 알기 쉽고 생생하다. 아무리 다가가도 가까워지지 않는 성, 들어갈 수 없었음에도 나를 위해 열려있었다는 문 같은 경우도 그렇다. 많은 독자가 카프카로부터 구체적인 세계를 얻는 데에 성공한다. 그 세계는 아마도 흑백 색상이며, 관료들이 말쑥한 정장을 입었고, 병은 없지만 건강이 좋지 않을 것이다. ‘카프카세계의 심상은 대략 이렇다. 이 세계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에 따라나올 대답은 제멋대로이기 쉽다. 이 세계엔 해석할 단서, 전언이 없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심상을 좋아하기 위해선 독자가 전언을 작품에 투사해야 한다. 많은 독자가 카프카에 대한 심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나 그 내용의 실제는 제각각이 된다. ‘카프카를 좋아하는 독자는 그러한 기호의 이면으로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

 

  ‘카프카는 수렴하지 않는다. 어느 해외 노래는 <카프카가 되는 군청에>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알려졌다. 이 제목은 오역이다. 적절한 번역은 <카프카적인 군청에>이다. 오역된 제목이 의미하는 이미지는 낯설다. 군청이 카프카가 된다. 이는 곡의 작자가 의도한 바도 아니고 카프카의 기존 용법에 들어맞는 표현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이미지는 의심받지 않은 채 올바른 번역보다 널리 받아들여진다. (이 자체가 일종의 카프카적 상황이다.) 이는 카프카가 열린 개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위의 어색한 표현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따져보게 된다. 카프카적 세계에서, 군청이 카프카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원래 카프카의 세계에선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럴듯한가.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위의 오역이 정착될 수 있었다. 아마 많은 문장이 카프카의 세계에서 그렇다고 용인될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필치는 초현실과 꿈 같은 유동적인 질감을 띈다. 이 유동체 속에 용해되는 것은 더 이상 양복과 관료가 가득한 불안한 미로로써의 카프카와도 다르다. ‘카프카를 말하는 이는 실제의 카프카를 초과하기 때문이다. ‘카프카라는 발화는 카프카의 세계에 문장을 대입하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거친다. ‘카프카는 그 실험에 의해 계속해서 외연을 확장하는 열린 개념이다. 어느 날 카프카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거대한 카프카로 변해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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