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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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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는 멎지 않고 환상통을 부른다 양서토 - 2024.05.31.    그건 가짜 같았다. 레이무는 아치교 꼭대기에 서 있는 새 장식에 눈이 마주쳤다. 그걸 새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는 확신이 없었다. 날개는 새의 것이었지만 그 밖의 얼굴이며 몸이 꼭 사람 꼴이었다. 아치 꼭대기가 높아 분명히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날아서 다리 위로 올라갔다. 장식을 향해 가까이 다가섰다. 그것에 손을 대보려 했다. 그러자 새 장식은 날갯짓을 치며 달아나 버렸다. 진짜였구나. 그녀는 새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밑에서 레이무를 부르고 있었다. 되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이모에게 돌아가 자기가 본 것에 대해 물었다. 세상에 그런 새는 없었다. 환상을 본 거라고 이모는 단언했다. 레이무는 정말로 봤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보여드리면 믿으시겠죠. 그녀는 다시 새..
내일이 뭐였으면 오늘이 이하루 - 2024.03.05. 며칠 뒤, 가구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우리만 먼저 도착했다. 실수였다. 그건 오늘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였다. 가구는 며칠 뒤에나 들어올 거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오늘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지. 우련이 맞장구를 쳤다. 우련은 늘 성인이 되면 집을 구하리라며 입다짐을 부려왔고 정말 그렇게 했다. 그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욕실부터 살폈다. 나도 뒤따라 어깨너머로 들여다봤다. 그는 문턱 밖에 서서 안을 건너다봤다. 욕조가 있었다. 이 집엔 욕조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고 나는 말했다. 우련이 내게로 기우듬히 고개 돌렸다. 그대로 골똘하다가 반문했다. 욕조는 원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내가 욕실로 들어섰다. 열어둔 문가에서 우련은 기어코..
바나나는 하나의 바게트가 되고 싶었어 양서토 - 2023.11.28. 나는 멋쟁이 바나나. 내 꿈은 바나나 바게트가 되는 거였어. 중학교 시절, 옆 반에 바게트가 있었어. 그것도 멋진 바게트가. 그 애는 따끈하고 밀의 냄새가 났어. 녹말이 많은 사람들은 대개 그래. 모두와 잘 어울리고 어울리는 사람까지 돋나 보이게 하지. 나는 그 애를 찾아가서 말했어. 나는 바나나 바게트가 되고 싶다고. 나와 함께 해달라고. 그 애는 놀랐던 것 같아. 쩌적, 크러스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지. 그리곤 대답도 해주지 않고서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어. 다음날에 나는 선생님에게 불려 가게 됐어. 거기서 선생님이 대신 대답을 해주더군. “너는 바나나야. 걔는 바게트고. 바나나거나 바게트거나 둘 중 하나야. 바나나 바게트가 될 수는 없어.” 그렇지만 나는 무화과 바게트..
드랍 이하루 - 2023.11.15. 옥상에서 너는 그를 마주친다. 마침 네 얼굴은 한창 울면서 진창같이 되어있다. 죽고 싶도록 부끄러웠으므로 이 김에 죽기로 결심한다. 너는 헤까닥 담장 위를 올라타려 몸을 솟군다. 높이가 모자란 바람에 넘어가지 못한다. 뒤편에서 그가 큰소리를 내 너를 불러세운다. 너는 담장 너머를 향해 몸을 재촉한다. 담벽을 붙잡고서 못 미친 발돋움을 칠떡댄다. 그가 너를 붙잡아 떼어낸다. 너는 얕은 뿌리처럼 엉성하고 요란히 뽑혀 나간다. 너와 그는 나란히 바닥을 나뒹군다. 너희는 바닥에 찧인 데를 앓느라 서로 말문이 막힌다. 왜. 그가 먼저 따져 묻는다. 왜 그래. 너는 뭉개 감았던 눈을 뜬다. 그가 널 눈앞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아까 같은 충동이 화끈 차오른다. 너는 계단실을 향해 급스..
예보 이하루 - 2022.08.11. 범은 별안간 속력을 높여 차를 다그쳐 몰았다. 하늘빛이 먹먹해졌고 비가 내리리란 예보가 있었다. 이왕이면 정장에 물먹이지 않을 셈이었다. 게다가 우산이며 젖은 밑창 따위가 통메우는 실내를 범은 질색했다. 식장까지는 삼십 분 남짓한 거리였다. 범의 가속에 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무릎에 올린 손아귀에도 힘이 실렸다. 범은 룸미러로 안의 눈언저리를 흘겼다. 그건 무언가를 참고 다스리려는 몸짓처럼 보였다. 얼마 안 가 안이 눈주름을 풀었다. 범이 그녀를 거울로 비춰 보고 있었다. 그녀는 반동으로 뒤로 쏠린 몸을 내처 시트에 쭉 붙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범의 얼굴을 바로 향해 보았다. 걔는. 안은 말문을 떼려다가 우선 목부터 축였다. 컵홀더에 손을 뻗으려면 좌석에 파묻힌 몸을..
매장 이하루 - 2022.03.22. 유미는 땅에 묻기를 원했다. 달리 장례할 방법은 알지 못 했을 거였다. 부모는 도울 생각이 없댔다. 우리는 죽은 생쥐를 추슬러 산으로 갔다. 도회에서 너그럽고 무른 땅이라곤 거기밖엔 없었다. 유미는 금세 숨이 찼고 찬기를 들여쉰 코끝이 매작지근히 발개졌다. 그는 걸으면서 계속 흔들렸다. 걸음이 얕아 자꾸만 발부리가 걸리는 탓이었다. 겨울옷이 끼어 몸이 잠긴 모양이었다. 산의 질커덕한 땅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유미는 얼김에 멎어서며 손에 움킨 생쥐를 들여다봤다. 그건 유미의 양 손뼉에 뻣뻣히 들어맞아서 흘러 떨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죽은 건 삼일 전이었다. 그 사흘 동안 유미는 생애 처음 맞는 사체를 두고 방도를 잡지 못 하고 있었다. 쥐는 제자리에서 가만가만..
선인장 이하루 - 2021.08.18. 선인장이 죽었다. 적어도 그래 보였다. 색과 부피를 잃어버린 것들은 대개 그랬다. 연은 분재를 내려놓았다. 방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화는 조금 놀랐다. 연이 뜻밖에도 담담했다. 창틀로 바람 소리가 새들어왔다. 화는 마른 기침을 했다. 선인장은 하루 아침에 죽어버린 게 아니었다. 건조는 몇주를 거쳐 계속 되었다. 죽음의 기점을 그 진행 속에서 언제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다만 연은 선인장의 변색과 수축을 보며 각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났을 때 화에게 그것이 죽었다고 말했다. 익사가 아니면 외려 죽기도 어렵댔는데, 결국은 말라 죽었다고. 화는 연을 존조리 타일렀다. 꽃 터지는 것도 봤으니 나름 천수를 다한 거랬다. 쁘띠 다육이 그만큼 사는 거 쉽..
회로 이하루 - 2021.06.25. 무연이 언제까지 걸을 테냐고 말했다. 나는 그때 퍼진 훈김을 맞았다. 우리는 고층 타워의 전망대를 나란하게 내리 돌고 있었다. 이곳은 앉을 자리가 없었고 외각의 지상 망원경은 렌즈가 닫혔다. 밤인데도 안개가 끼어 여기로 오는 사람은 달리 없었다. 간혹 올라온 사람은 얼마 안 있어 도로 내려갔다. 전망은 어렴풋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주에 붉은 달이 뜨리라는 예보가 있어 전망대엔 그때에 올 셈이었는데, 그 약속은 결국 파했다. 무연이 그 날 다른 일정을 예정했고 도저히 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댔다. 무연은 실수라며 사과했다. 그리곤 대신으로 오늘 달을 보러 가자며 마물렀다. 그녀는 뭐든 자주 잊어버렸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마주 섰다. 무연이 이쪽을 또렷또렷 쳐다보며 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