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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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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의 뉴스과 여기의 사육장 2025.03.19.    그때 세상에선 매머드 화석의 얼음이 녹고 있었다. 매머드는 아주 멀리에 있었고 우리는 그 소식을 텔레비전 뉴스를 듣고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본 적이 없지만 세상엔 그런 일들도 일어났다. 여기는 아니다. 여기는 다른 세상이거나 혹은 세상이 아닌 것처럼. 나는 백지에게 타일렀다. 그런 일들은 외국에서나 일어나는 것이라고. 어느 해변에는 선박만큼 커다란 오징어가 밀려 들어왔고 어딘가의 호수엔 목이 긴 공룡이 산댔다. 여기선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 여기에선 백지가 뱀을 보러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백지가 말하는 뱀은 물론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실의 상판에서 밥을 먹고 있었고 텔레비전에선 아나콘다가 실리콘 마네킹을 굼뜨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건..
무서워 할 것 없다 우린 옛집에 들어섰다. 누나는 나에게 무서우냐고 물었다. 무서워 할 것 없다. 나는 스스로 뇌까렸다. 이건 옛집일 뿐이었다. 누나의 말로는 사진첩을 옛집에 두고 온 것 같댔다. 나는 그 말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의미로 이해했는데 그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다. 누나는 사진첩을 가지러 가자고 했다. 무슨 소리야? 옛집은 이제 없는데. 그러나 옛집은 여기 남아있었다. 우리가 초등학생일 때 집을 옮긴 이후로 다시 온 일이 없었다. 이사는 급하게 결정됐다. 이사는 뭣하러 떠나냐고, 전학 가던 날 친구들이 내게 물었다. 나는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다. 이사의 이유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상경하는 것도 아니었고 부모의 일터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나도 굳이 이유를 묻진 않았다. 어쩌면 별다른 이유는 없는지..
누구도 모르는 농담과 네가티브 크립 나는 부정적 찐따, 나는 부정적 찐따, 나는 부정적 찐따, 그리고 나는, 나는 네가티브 크립을 듣죠. 네가티브 크립을 듣는 데에는 몇 가지 난관들이 있습니다. 첫째, 너바나라는 소외된 감수성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것, 둘째, 너바나 앨범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못 받는 블리치 앨범을 골라야 한다는 것, 셋째, 네가티브 크립은 그 앨범에서도 별로 회자 되지 않는 트랙이라는 것이에요. 아티스트, 앨범, 트랙, 세 번의 결정을 모두 비주류적으로 내려야만이 네가티브 크립을 듣게 되죠. 그래서 네가티브 크립의 후크 노랫말은 꼭 세 번 반복되는 거에요. 암 어 네가티브 크립, 암 어 네가티브 크립, 암 어 네가티브 크립... 네가티브 크립을 듣는다는 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무려 삼중으로 부정적이고 찐따..
이상한 일 혹은 레인보우 파이 그건 간단한 문제 같았다. 저기에 영이 앉아있었다. 그는 턱 괸 고개로 창가를 흘겨봤다. 창문엔 서리만 욱욱했다. 그의 앞엔 케이크 한 조각이 놓여있었다. 혹은 졸업파티 기념 레인보우 파이라고 부르든지. 영이 단 것을 입에 대지 않는 식성이란 사실은 교실 모두가 아는 바였다. 틀림없건대 그는 케이크를 먹지 않을 터였다. 덩치가 영의 자리에 찾아갔다. 덩치는 케이크를 가리켰다. 먹지 않을 거면 자기에게 달라고 졸랐다. 헉하고 숨을 삼키느라 영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개만 도리 저어 거절했다. 덩치는 납득하지 못하고 계속 쏘삭댔다. 영이 케이크를 원하는 척 연기를 하고 있다며. 사실은, 영의 몫의 케이크가 아예 분배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으로써 케이크 예산이 낭비되는 일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제안이었..
헛바람과 환상통 양서토 - 2024.05.31.    그건 가짜 같았다. 레이무는 아치교 꼭대기에 서 있는 새 장식에 눈이 마주쳤다. 그걸 새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는 확신이 없었다. 날개는 새의 것이었지만 그 밖의 얼굴이며 몸이 꼭 사람 꼴이었다. 아치 꼭대기가 높아 분명히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날아서 다리 위로 올라갔다. 장식을 향해 가까이 다가섰다. 그것에 손을 대보려 했다. 그러자 새 장식은 날갯짓을 치며 달아나 버렸다. 진짜였구나. 그녀는 새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밑에서 레이무를 부르고 있었다. 되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이모에게 돌아가 자기가 본 것에 대해 물었다. 세상에 그런 새는 없었다. 환상을 본 거라고 이모는 단언했다. 레이무는 정말로 봤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보여드리면 믿으시겠죠. 그녀는 다시 새..
내일이 뭐였으면 오늘이 이하루 - 2024.03.05. 며칠 뒤, 가구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우리만 먼저 도착했다. 실수였다. 그건 오늘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였다. 가구는 며칠 뒤에나 들어올 거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오늘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지. 우련이 맞장구를 쳤다. 우련은 늘 성인이 되면 집을 구하리라며 입다짐을 부려왔고 정말 그렇게 했다. 그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욕실부터 살폈다. 나도 뒤따라 어깨너머로 들여다봤다. 그는 문턱 밖에 서서 안을 건너다봤다. 욕조가 있었다. 이 집엔 욕조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고 나는 말했다. 우련이 내게로 기우듬히 고개 돌렸다. 그대로 골똘하다가 반문했다. 욕조는 원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내가 욕실로 들어섰다. 열어둔 문가에서 우련은 기어코..
드랍 이하루 - 2023.11.15. 옥상에서 너는 그를 마주친다. 마침 네 얼굴은 한창 울면서 진창같이 되어있다. 죽고 싶도록 부끄러웠으므로 이 김에 죽기로 결심한다. 너는 헤까닥 담장 위를 올라타려 몸을 솟군다. 높이가 모자란 바람에 넘어가지 못한다. 뒤편에서 그가 큰소리를 내 너를 불러세운다. 너는 담장 너머를 향해 몸을 재촉한다. 담벽을 붙잡고서 못 미친 발돋움을 칠떡댄다. 그가 너를 붙잡아 떼어낸다. 너는 얕은 뿌리처럼 엉성하고 요란히 뽑혀 나간다. 너와 그는 나란히 바닥을 나뒹군다. 너희는 바닥에 찧인 데를 앓느라 서로 말문이 막힌다. 왜. 그가 먼저 따져 묻는다. 왜 그래. 너는 뭉개 감았던 눈을 뜬다. 그가 널 눈앞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아까 같은 충동이 화끈 차오른다. 너는 계단실을 향해 급스..
예보 이하루 - 2022.08.11. 범은 별안간 속력을 높여 차를 다그쳐 몰았다. 하늘빛이 먹먹해졌고 비가 내리리란 예보가 있었다. 이왕이면 정장에 물먹이지 않을 셈이었다. 게다가 우산이며 젖은 밑창 따위가 통메우는 실내를 범은 질색했다. 식장까지는 삼십 분 남짓한 거리였다. 범의 가속에 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무릎에 올린 손아귀에도 힘이 실렸다. 범은 룸미러로 안의 눈언저리를 흘겼다. 그건 무언가를 참고 다스리려는 몸짓처럼 보였다. 얼마 안 가 안이 눈주름을 풀었다. 범이 그녀를 거울로 비춰 보고 있었다. 그녀는 반동으로 뒤로 쏠린 몸을 내처 시트에 쭉 붙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범의 얼굴을 바로 향해 보았다. 걔는. 안은 말문을 떼려다가 우선 목부터 축였다. 컵홀더에 손을 뻗으려면 좌석에 파묻힌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