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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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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계 양서토 - 2020.10.10. “문학을 다 읽고. 별일이네.” 렌코에게 상담을 구하던 메리가 가장 처음 듣게 된 말은 그것이었다. 메리는 침대의 위층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렌코에게 그녀의 시선이 꽂혀들었다. 지금 문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어름어름 대꾸하곤 끊겼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곰곰 듣고 있던 렌코는 질문의 얼개를 잡았는지, 느닷없이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녀들은 나란히 엎드려 누웠고, 침대의 아쉬운 너비에 맞추어 서로 어깨 한 쪽을 맞댔다. 메리의 질문은 엔트로피라는 개념과,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종말 시키는가에 대한 설명을 묻는 것이었다. 물리학부생인 렌코는 이내 쉬이 답변을 쏟아냈다. 그들은 수면 파자마 바람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학술적인 대화를 나눴다. 엔트로피 이론은 모든 에너지가 결..
이명 이하루 - 2020.11.04. 여행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난 피곤했고 씻지 못한 채 소파에 누웠다. 텔레비전 소리가 흘러나왔는데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 외에는 조용했다. 나는 거의 잠들어가고 있었다. 별안간 안이 방에서 걸어나와 나를 불렀다. 나는 일어나야 했다. 어둡던 마루에 불이 들어왔다. 귀가 계속 아파. 그녀는 오른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귀갓길 중에 안은 갑자기 귀울림이 들린다고 말했다. 귀 안쪽이 먹먹하고 경고음 같은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병원에 데려가기를 원했다. 그때가 오전 한 시였다. 나는 저절로 호전되기를 기다려보자 제안했고 우리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더러 조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맞아,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그녀는 말..
열사병 이하루 - 2020.08.08. J가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십 분 거리에 있다던 버스가 연착되던 참이었다. 다른 노선의 차량들이 정류소에 뜨거운 매연과 배기음을 끼얹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버려진 아이스크림 컵의 꾸덕한 녹색 내용물이 신발에 닿을까봐 몇 번씩 우리의 발치를 내려다봤다. 정류소엔 우리밖에 없었다. J는 데님 남방의 단추를 서넛 끌러, 팔과 함께 옷의 품을 등 뒤로 넘겼다. 속엔 민소매를 덧대 입었다. 동그란 어깨가 여름의 햇빛을 매끈하게 반사했다. 난 J의 상체 맵시를 처음으로 보고 있었다. 너 말랐네. 언제나 옷을 널널한 크기로 입는 고집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J는 뒤로 당기고 있던 견갑을 느슨히 이완시켰다. 더 이상 빠지긴 어려울 테니까 걱정 마. 나는 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