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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단편

열사병

이하루 - 2020.08.08.


  J가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십 분 거리에 있다던 버스가 연착되던 참이었다. 다른 노선의 차량들이 정류소에 뜨거운 매연과 배기음을 끼얹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버려진 아이스크림 컵의 꾸덕한 녹색 내용물이 신발에 닿을까봐 몇 번씩 우리의 발치를 내려다봤다. 정류소엔 우리밖에 없었다. J는 데님 남방의 단추를 서넛 끌러, 팔과 함께 옷의 품을 등 뒤로 넘겼다. 속엔 민소매를 덧대 입었다. 동그란 어깨가 여름의 햇빛을 매끈하게 반사했다. 난 J의 상체 맵시를 처음으로 보고 있었다. 너 말랐네. 언제나 옷을 널널한 크기로 입는 고집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J는 뒤로 당기고 있던 견갑을 느슨히 이완시켰다. 더 이상 빠지긴 어려울 테니까 걱정 마. 나는 칠 월의 기온으로 인한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기다리던 버스가 정차하고 J는 옷을 여몄다. 그리고, 예정보다 삼십 분 늦게 도착한 버스에 아무 말도 않고 올라탔다.
  나중엔 병원에서 J의 체중을 들을 수 있었다. 42킬로그램이었다. 체중 측정은 입원 후에 총 세 번 이루어졌고, 그게 마지막 기록이었다.

  고기를 샀다. 네 개의 종이 박스. 42킬로그램의 돼지고기였다. 등심, 안심, 앞다리살, 뒷다리살을 섞어서 주문했다. 박스를 하나씩 밀어서 냉장고 앞으로 가져갔다. 고기는 스티로폼 받침대와 비닐랩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냉동실에 집어넣었고 넘쳐 남아버린 것들이 냉장실로 들어갔다. 싱크대의 거름망에선 달큰히 썩어가는 믹스베리의 냄새로 초파리들이 꼬여들고 있었다. 냉동실에서 고기가 쓰러져 나오지 않도록 하느라 오 분이 걸렸다. 냉장고 문을 닫을 때 뭉툭한 저항이 느껴졌다. 몸을 기대어 눌렀다. 적어도 상해버리기 전엔 전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워진 박스는 깨끗했다. 기름이나 핏물의 흔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박스를 하나로 겹쳐넣어서 현관에 뒀다.
  오후엔 연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독서 동호회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 모임에도 오지 않을 것이냐는 내용이었다. 가지 않을 생각이었고 그대로 답장을 보냈다. J가 오지 않게 된 이후로 죽 나가지 않았다. 연우와는 재작년에 인터넷으로 알게 된 사이였다. 괴기 소설 팬덤의 커뮤니티였다. 접속할 때마다 늘상 보이던 닉네임들만이 눈에 밟히는 작고 정체된 곳이었다. 그곳에서 카프카 소설을 괴기 소설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연우와 나는 ‘아니다’ 쪽으로 의견을 같이 했다. 그가 독서 동호회를 시작할 거라며 나에게 참여 제안을 했던 것도 그때의 일이 조금은 계기가 되어주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여덟 명의 인원이 모이고 나서 격주로 모임이 진행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J를 만났다.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했다. J의 차례였다. 심리학과 삼 학년입니다. 창가에 들어온 햇살로 피부가 따가웠다. 블라인드는 도르래가 걸렸는지 펴지지 않았다. J는 완전히 양지 안에 앉아있었다. 나는 세 번째 재수를 준비 중이었다. 스물셋이고, 수험생이에요. 모임은 회차를 거듭함에 따라 인원이 떨어져나갔다. 모집 공고가 잘못되었는지 대부분의 사람은 이곳이 일반적인 독서 모임인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연우의 마니악한 작품 선정에 질려버린 사람들은 점차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사회차였던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때에는 나와 연우, J, 세 명만이 모였다. 이후엔 뒤풀이를 했다. 어두운 포차에서 맥주를 마셨다. 다들 취하지 않도록 자제했다. 연우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며 같이 필 사람은 없겠냐고 물었다. J가 대답했다. 자신은 피우지 않고 아마 나도 피우지 않을 거라고. 나는 동의하고 나서 그건 어떻게 알아냈는지를 물었다.
  “연우 씨가 흡연자라는 걸 듣고 조금 놀라셨던 것 같은데. 똑같이 흡연자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확률이 높아요. 동질감에 따른 반응 차이죠.”
  그런 경향이 있는 것뿐이니 확신을 가졌던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연우는 혼자 나갔다. J가 내 앞에 앉아있었다. 테이블에 팔이 올라와있었다. 나는 그 소매를 낮게 집어올렸다. 여름에 그렇게 싸매고 있으면 더울 것 같아요. J는 얇아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나갔던 연우는 금방 돌아왔다. 나중에 얇은 긴팔을 입어봤는데 괜찮지 않았다.
  조만간 다시 문자 착신음이 울렸다. 이번에도 연우에게서였다. J가 놓고 갔던 물건을 전해주려고 하니 그러지 말고 한번 오라는 것이었다. 다음 모임은 오는 화요일 여섯 시부터였다. 알겠다고 답장했다. 미리 저녁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수육을 삶았다. 하는 김에 중간에 고기를 더 넣었다. 집 안에 뿌옇고 더운 김이 감돌았다. 밤늦은 아르바이트에 조금 싸들고가서 먹었다. 상가 건물 경비원 일이고, 좁은 경비실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다.
  모임은 역에 가까운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모임 일정이 다 끝나갈 때 즈음 해서 주변에 도착했다. 들어가지는 않았다. 카페는 외벽이 유리로 되어있어서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인원을 새로 구한 모양이었다. 연우를 포함해 여섯 명이 모였다. 그 중 기존의 멤버는 없었다. 기다리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곧 밖으로 나와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고서 갈라졌다. 연우의 권유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는 가져온 도시락이 있었다. 별일이네, 네가. 우리는 편의점 파라솔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그곳에서 먹을 걸 샀다. 의자의 팔걸이에 팔을 올리면 여름의 밤공기와 땀 기운 속에서 피부가 끈적히 달라붙었다.
  테이블 위에 플라스틱 케이스가 놓여졌다. 음악 앨범이었다. 커버에는 회색 배경에 붉은 감압복을 입은 사람이 그려져있었다. 걔 거야. 가족분들한테 돌려드릴까 했는데, 난 연락처도 주소도 몰라서. 연우는 그 앨범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가볍고 조잡한 테이블의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그래서 대신 전해달라거나 그런 건 아니야. 네 맘대로 해. 나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오래되어 여닫이의 이음새가 헐거워졌는지 안쪽에서 무언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프라이멀 스크림’이라는 밴드의 앨범이고, J가 자주 듣는다 말했다고 한다. J는 종종 하룻밤 내내 연락이 되지 않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음악을 듣고 있었다는 이유를 대곤 했다. 나는 잔말 없이 앨범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내가 돌려드릴게. 그리고 다시 식사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그걸 어쩌다 네가 갖고 있었어?”
  “걔가 내 집에 들릴 때 가져왔다가 잊고 갔으니까.”
  그가 이쪽의 음식을 먹어봐도 되겠느냐 물으며 손을 옮겨왔다. 돼지고기 볶음이었다. 제지했다. 목소리가 뜻밖으로 크게 나왔다. 테이블이 휘청였다. 그 위에 있던 것들은 모두 쏟아지지 않고 무사했다. 그는 움직이던 그대로 팔을 허공에 가만히 놓은 채 잠시 뜸을 들이다 순순히 물러났다. 내가 요리한 거냐고 물어오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것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먼저 식사를 끝낸 건 연우였다. 미안, 빨리 먹을게. 지방이 거의 없는 부위를 사용해서 질긴 감이 있었다. 턱이 피로해져 물로 넘겼다. 식도에 이물감이 머물렀다. 오분 정도 더 걸려서 전부 먹었다. 사백 그램이었다. 저녁에는 그만큼 먹도록 하고 있었다. 연우가 탄산음료를 사와선 권하길래 사양했다.
  일주일 간 십이 킬로를 먹었다.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여두고 일지를 작성했다. 이대로라면 한 달을 조금 넘겨서 전부 먹어치울 수 있을 거였다. 그러니까, 앞으로 약 삼주였다. 오는 길에 마트엘 들려 파인애플을 샀다. 껍질을 자르다 손을 베였다. 물을 넣고 갈아 주스를 만들어서 내일 치의 고기를 담궈 재웠다. 너무 오래 놔뒀다간 다짐육처럼 될 거라는 경고에 신경써서 제때에 꺼냈다.

  용산에서 전철을 내렸다. 내 자취방엔 시디를 재생시킬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전자상가를 무작정 헤맸다. 중고품을 취급하는 곳에서 워크맨을 찾을 수 있었다. 제품의 박스와 대형 스피커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책방 냄새가 났다. 그곳의 주인인 중년은 스포티한 소재의 카라티 차림이었다.
  이런 건 왜 찾으세요. 그는 자신의 키보다 높은 선반에 놓인 물건을 꺼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노래 들으려고요. 거쳐온 대부분의 가게들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는 두어 마디 더 캐물었다. 앨범이 있는데 그걸로 듣고 싶어서. 주인은 워크맨을 내린 후 케이블 전선 한 줄을 더 꺼내들었다. 그에게서 물건을 넘겨받기 전에 안경닦이 같은 천으로 먼지를 닦아냈다. 받아들어본 그것은 보기보다 무거웠다. 조개 모양으로 납작했고, 회색이었다. 먼지는 떨어냈어도 더께가 져서 잿빛으로 보이는 회색. 그가 케이블을 계산대 밑의 콘센트와 내가 들고 있는 그것에 꽂아 연결시켰다. 워크맨의 조그마한 다이오드에 주황색 불이 들어왔다. 충전기인 것 같았다. 소리가 잘 나오나 한번 들어보세요. 마침 그 음반을 지금 가지고 있었다. 허리를 기울여 가게에 있는 음반을 꺼내들려는 그를 말렸다.
  고출력의 일렉트릭 기타 소리가 큰 소리로 갈라져서 나왔다. 저질의 음향이었다. 줄을 쥐어당겨 이어폰을 빼냈다. 귀가 아팠다. 소리 크기를 줄이고 다시 들었다. 문제는 그대로였고 음량과는 상관이 없었다. 영어 가사가 뭉개져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거 뭔가 고장난 것 같은데요. 정품 음반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었다. 주인이 워크맨을 받아들고 이어폰을 꽂았다.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입술을 아래로 해 인중을 길게 했다. 그리고 버튼을 조작하더니, 다른 트랙은 멀쩡하게 들리네, 워크맨을 내게 되돌렸다. 정말이었다. 이번엔 음질이 정갈했다. 칠 만원이었다. 현금으로 결제한다는 조건으로 깎인 가격이었다. 그 이상은 흥정하지 않았다. 검은 봉투에 워크맨과 그 충전기를 담아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일몰이었다. 아까 전의 노래는 따로 찾아들어 봤다. 그건 원래 그렇게 녹음된 곡이었다.
  아르바이트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밤 아홉 시였다. 내 앞 시간엔 노인이 근무했다. 그와 교대했다. 경비 초소는 일층 건물 입구 앞에 놓여있어서 냉풍기 바람이 닿지 않았다. 의자와 책상, 카메라의 모니터 정도만 들여놓으면 남는 공간이 없을 정도라 따로 에어컨을 설치할 수도 없었다. (나는 여길 경비실이 아니라 경비 부스라고 부른다.) 그 노인이 탁상용 철제 선풍기를 가져와주어서 그것을 사용했다. 시간을 죽여 자정을 넘기면 인적이 줄어들었다. 건물 바깥을 향한 카메라에 곧잘 행인이 비춰져도 그들이 이쪽으로 오는 일은 드물었다. 행여 발길이 닿으면 일층 전체에 굽과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워크맨을 꺼내 음악을 틀었다. 버튼은 뻣뻣했지만 제대로 눌리고 잘 작동했다. 프라이멀 스크림의 앨범이었다. 음반 전체를 처음부터 들었다. 앨범 케이스 뒷면에 곡들의 제목이 적혀있어 트랙이 바뀔 때마다 확인해가며 들었다. 기분을 고조시키는 곡들이었다. 시끄럽고 진행이 난잡했다. 발목과 고개를 까닥이다 몸이 뻐근한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부스 밖으로 나가 기지개를 켜고 돌아왔다. 곡은 열한 개였고 앨범의 총 길이는 한 시간 정도였다. 그 동안 음악을 도중에 멈춰야 할 만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악이 끊기고 조용했다. 선풍기가 시원찮은 바람을 얼굴에 국소적으로 날려보냈다. 가져온 야식이 있어서 그걸 먹었다. 파인애플 냄새가 났다. 여섯 시가 될 때까지 꾸준히 먹었다. 밤새 일어나 있는 것엔 능숙했다. J에 의해 알게 된 것이었다.
  땀이랑 눈물은 성분이 비슷하다는 거, 알고 있어?
  J가 말했다. 그리고 웃었다. 둘 다 짠맛이 나는 게 그것 때문이었느냐고 맞장구를 쳤다. 나는 여름볕을 맞아 정직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J는 긴팔 차림이었는데 그런 기색은 없어보였다. 걷는 동안에 낮이 지나갔다. 북토크엘 다녀오는 길이었다.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내 쪽에서 말을 꺼낸 거였다. 미스터리 작가와의 대담이었는데 그 점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한 마디로 취향이 아니었다. 끝나고 나서 미안하다고 했다.
  편의점에서 맥주와 간식을 샀다. 옆에 공원이 있어 그리로 갔다. 벤치는 대부분 비어있어서 아무데나 앉았다. 네 캔 중에 세 캔을 내가 마셨다. 나는 말을 빠르게 많이 뱉어냈다. J의 진단이었다. 자기처럼 말을 조금 천천히 해보라는 소리를 두 번 정도 들었는데 잘 되진 않았다. 네가 호응이 많으니까. 나는 J의 늘어진 긴 소매를 만졌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고 문질렀다. 더운데 왜 계속 이런 옷을 입지. J는 이게 좋다는 대답을 했다. 주변의 등불로 나방 같은 것들이 모여들었다. 눈에 띄게 불어나다가 어느정도 수가 쌓이자 멈췄다. J가 슬슬 들어가보자고 말했다. 부모에게 내 수험 생활에 대해 설교 들었던 일을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사온 술은 이미 바닥났다. 조금만 더 있다 가자고 했다. J는 알겠다고 했다.
  아까 전의 편의점에서 맥주를 더 샀다. 계산원과 한 노인이 말씨름이 붙어서 기다렸다. 오는 길에 공원 탑시계를 볼 수 있었다. 두 시가 조금 넘었다. J는 잠들어있었다. 다리가 짧은 벤치라서 두 발이 바닥으로 쭉 펴져있었다. 옆에 앉았다. 달려오느라 열이 올라 가만히 있었다. 자리가 불편한 탓에 J는 한 시간이 조금 안 돼서 깨어났다. 그리고 내게 사과했다. 새벽이라 차가 끊겨 택시를 불렀다. 난 자취방으로 돌아가 해가 뜰 즈음에 잤다. 그 후로 J와 만날 때는 늘 새벽 두 시까지만 있었다.

  이제 배가 부풀어올랐다. 만지면 제법 단단한 탄력이 있었다. 살이 나온 게 아니었다. 손바닥을 대어 아래부터 들어올리듯 힘을 넣어보면, 작용점뿐만 아니라 복부 전체에 자극이 갔다. 배가 커다란 염증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걸을 때 옷에 배가 닿아서 거북스러웠다. 아침에 내과를 찾아 소화불량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식습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집에 고기가 잔뜩 쌓여있어서 그걸 주로 먹고 있다고 답했다. 진료 중에 의사가 몸을 눕힌 채 배를 눌렀다. 그러면서 눌렀을 때 아프냐는 것을 확인했는데 목소리가 잘 안 나왔다. 탄수화물이 부족하니 식사할 때에 신경쓰라는 조언과 함께 처방전을 받았다. 그러다 몸 상해요. 두 종류고 모두 식후약이었다. 둘 다 소화제냐고 물으니까 그렇댔다. 약국에서 약을 받고 그곳에서 바로 복용했다.
  J의 집은 제일 가까운 역에서 내린 후 도보로 삼십 분이 걸렸다. 밝은 톤의 벽돌로 쌓아올려 고동색의 지붕을 덮은 주택이었다. 벨을 누르자 안에서 젊은 여성이 나왔다. J의 병실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현관 디딤석 위에 서서 티셔츠 앞섬을 잡고 펄럭였다. 주변에 큰 나무는 없는데도 매미가 시끄러웠다. 사정을 설명하고 그 앨범을 내밀었다. 디스크를 워크맨에서 빼둔다는 걸 잊어버려 보는 앞에서 옮겨담았다. 그녀는 앨범을 받아들고 케이스 앞뒷면을 뒤집어 가며 살펴보다가 이게 당신한테 있었느냐며 알은체했다.
  “걔가 이거 틀면 방에서 소리 지르면서 울고 그랬는데. 혹시 왜 그랬는지 알아요?”
  나는 J가 그 음반을 듣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잠시 뜸을 들였다. 몰랐다고 했다. 모르겠다로 정정했다. 그녀는 작은 폭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하도 시끄럽게 해서 나중엔 가족들이 집에서 듣지 못하게 강경히 말해뒀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데에 가서 그랬는가 싶었네요. 대화가 끊겼다. 서로 적당히 인사말을 나눴다. 그녀가 현관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것을 멈춰세웠다. 혹시 제가 조금만 더 갖고 있으면 안 될까요. 그녀는 이 앨범을 말하는 것이냐며 짐짓 확인한 뒤 거절했다. 나는 앨범 제목을 기억해두기 위해 그것의 앞면을 넘어다봤다. 혹시 그쪽 이름이… 그녀는 문지방에 멈춰서서 이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두 모르는 이름들이었다. 적어도 J의 입에서 들어본 적은 없었다. 네 번째 시도에 내 이름을 맞췄다. 그녀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을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그러다 눈을 마주쳤다. 내가 마른침을 삼켜 잠시 목을 닫고 있던 참에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더웠다.
  그 음악을 들으려면 인터넷을 이용해야 했다. 검색에 걸린 게시글에서 ‘프라이멀 스크림’이라는 밴드명의 유래를 소개한 것이 미리보기에 노출됐다. 억압된 감정을 비명으로 발산시키도록 하는 동명의 심리 치료 방법이 있고, 거기서 밴드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 같다. 치료의 원리를 듣고 프로이트를 떠올렸다. 억압이란 어휘가 그랬다. 그 앨범의 모든 트랙을 음원 파일로 추출해 저장했다. 공시디로 구울까 하다가 번거로울 것 같아 그만뒀다. 워크맨은 구매했던 곳에다 되팔았다. 가게 주인은 나를 이상한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맡고 있었던 앨범 외엔 달리 가지고 있는 음반도 없었다. 매입가는 처음 살 때의 절반도 쳐주지 않았다. 충전 케이블을 빠뜨리고 가져오지 않았는데 다시 오기는 뭣해서 그건 내다버렸다.
  저녁 식사 땐 예정된 분량을 조금 남겼다. 일지에 기록했다. 이 정도는 차질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 이십오 킬로그램이 남았다.
  밤엔 연우와 약속을 잡았다. 내가 그의 집에 찾아갔다. 원룸에 혼자 살고 있었다. 큰 책장이 침대와 함께 벽 한 쪽을 완전히 가렸다. 괴기 소설 외의 책도 많았다. 음악 앨범, 영화 패키지 같은 것들도 꽂혀있었다. 오디오 같은 게 있을 줄로 알았는데 대신에 큰 스피커가 데스크탑에 연결되어 있었다. 넓지 않고 깔끔한 방이었다. 내가 올 시간에 맞추어 배달 음식을 시켜놓았다고 한다. 얼마 안 있어서 배달이 도착했다. 치킨이었다. 나는 속이 안 좋아서 못 먹겠다고 했다. 나는 마실 것만 앞에 두고 앉았다. 그가 음악을 틀었다. 티비가 없으니 이거라도 틀어놓지 않으면 너무 적막하다는 것이었다. 그 대형 스피커는 서라운드가 좋은 소리를 냈다. 그것을 칭찬하면서 말꼬리를 틀었다. J가 들고 왔던 앨범도 저걸로 들었냐고 물으니 그렇댔다. 그 앨범은 한 번 듣고서 가족분에게 돌려드리고 왔다고 알렸다. 그는 두 번 들을 건 못 된다며 묘한 데에서 호응했다. 왜 그러냐니까 그냥 별로였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런 걸 놓고 가고, 어지간히 정신이 없었나보네. 네가 좀 더 일찍 갖다주지 그랬어. 연우는 안 그래도 모임에 나오면 돌려주려고 했는데, 그 날 이후엔 J를 볼 수 없었다고 대꾸했다. 그는 날짜를 기억해내서 말해줬다. 걔가 쓰러져서 입원하기 이주 전이네. 그는 입에 든 것을 씹느라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돌려줬어도 써보진 못했을 것 같다. 집에서 그거 못 듣게 했다고 그러더라. 연우는 계속 고갯짓만 했다. 플레이리스트가 다 돌아 음악 소리가 끊겼다. 연우의 말대로 조용했다. 이번엔 내가 틀어도 되겠냐고 동의를 구했다. 그러라고 해서 데스크탑 쪽으로 갔다. 스피커에선 드럼이 크게 들렸다. 소란스러워서 음량을 적당한 데까지 줄였다. 다들 이걸 싫어하나봐. 내가 말한 것들에 관해 연우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버스에 탄 우리는 정원으로 가고 있었다. 여름꽃이 예쁘다는 곳이었다. 차내엔 냉풍이 돌았다. J는 목을 좌석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하차한 뒤엔 다시 단추를 위에서부터 서넛 풀었다. 폭염이 예보된 날이었다. 힘들면 그만두고 실내로 들어가자고 합의했다. 공기가 후터분해서 향을 알 수 없었다. J에겐 괜찮으냐고 수시로 물었다. J는 이따금 멍해지다가 빈혈이 왔다. 휘청이는 걸 붙잡았다. 체중이 가벼워서 망정이었다. J가 사과했다. 우리는 주변의 카페를 향해 걸었다. 힘들면 말하라고 했잖아. 다음 번엔 물가로 가자. 바다든 계곡이든. 물에다 밀어넣으면 그 답답하게 입은 꼴은 안 봐도 되겠다. 카페에 찬바람이 나와서 쉬다가 일찍 돌아갔다. J는 며칠 뒤에 쓰러졌다.

  냉장고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전원이 나가있었다. 불도 켜지지 않았다. 정전인 모양이었다. 물은 냉동시켰던 고기가 해동되면서 생긴 거였다. 문을 열자 더운 냄새가 끼쳐왔다. 냉동실엔 아직 고기가 빽빽이 들어찼다. 배가 밀려들어갔고 입 안에 침해가 있었다. 변기에 구토했다. 화장실은 불이 꺼져 어두웠다. 배에 긴장이 느껴져 팔로 감았다. 눈물샘이 눌려 눈물이 나왔다. 목에 핏대가 섰다. 만지니까 또 역류했다. 점차 압력이 잦아들었다. 게워내고서도 역한 기운이 남아있어 좀 더 쏟아내고 싶었다. 목젖을 떨어 끓는 소리를 내면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잘 나오지 않아 애썼다. 입을 씻어내고 나선 현기증이 도져 바닥에 쓰러졌다. 좁아서 몸을 뉘일 데는 없었다. 진정되고 나니 목이 아팠다. 귀도 먹먹했다. 힘이 없어서 한동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무심코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주의를 기울여서 문밖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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