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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단편

닫힌 계

양서토 - 2020.10.10.

 

 

“문학을 다 읽고. 별일이네.”

 

렌코에게 상담을 구하던 메리가 가장 처음 듣게 된 말은 그것이었다. 메리는 침대의 위층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렌코에게 그녀의 시선이 꽂혀들었다. 지금 문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어름어름 대꾸하곤 끊겼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곰곰 듣고 있던 렌코는 질문의 얼개를 잡았는지, 느닷없이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녀들은 나란히 엎드려 누웠고, 침대의 아쉬운 너비에 맞추어 서로 어깨 한 쪽을 맞댔다. 메리의 질문은 엔트로피라는 개념과,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종말 시키는가에 대한 설명을 묻는 것이었다. 물리학부생인 렌코는 이내 쉬이 답변을 쏟아냈다. 그들은 수면 파자마 바람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학술적인 대화를 나눴다.

 

엔트로피 이론은 모든 에너지가 결국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로 전환된다고 하는 내용으로, 엔트로피의 증가는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의 증가와 같다. 중요한 건 닫힌 공간에서 엔트로피는 증가할 뿐 감소하지는 않는다는 것. 엔트로피가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에너지는 전부 소진되어 세계는 정지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게 이 이론에서 말하는 세계의 종말이다.

 

말을 끝마친 렌코는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메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엄밀한 설명은 아니지만, 메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이게 최선인걸.” 둘은 얼마간 너스레 아옹다옹거렸다. 렌코는 설명 중에 포스트잇에 필기했던 것을 떼어내 메리에게 건넸다. 중요하다고 짚었던 ‘닫힌 공간’ 부분엔 별 모양이 표시되어 있었다. 메리는 그걸 읽고 있던 페이지에 붙였다. 확실히 그 페이지에서 엔트로피라는 용어가 언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단어는 전문용어였고 그녀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라는 문장이 렌코의 눈에 밟혔다. 책이 현실을 예견한 것처럼 되었다고 생각한 렌코는 웃음을 삼켜야 했다.

 

“그래서. 네가 웬일로 문학에 흥미가 돌았는지는, 말해주지 않을 거야?” 렌코가 팔꿈치를 세워 메리를 얕게 찔러댔다. “그것도 거의 알아들을 수도 없는 걸 말야.”

 

“웬일이고 뭐고… 딱히 없거든. 나도 소설 정도는 읽는다고.”

 

흥. 곡선으로 손을 휘둘러 렌코의 팔을 때렸다. 메리의 손이 나아간 방향으로 침대의 위 칸이 조금 튀어나갔다. 두 사람의 몸도 같은 쪽으로 쏠렸다. 기둥이 흔들림에 따라 곳곳의 접합부에서 목재가 짓물리는 소리가 났다. 관성의 작용으로 돌출되었던 위 칸은 모서리로 반대편의 벽을 찧으며 조만간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침대의 프레임에 한 차례 뭉툭한 진동이 내달렸다. 메리는 양팔로 렌코의 웅크린 등을 붙들고 있었다. 의도가 아니었다.

 

*

 

야행성 요괴 야쿠모 유카리는 자정 즈음 잠에서 깨어났다. 보통 때보다 한 시간 정도 늦은 거였다. 그녀의 종자인 야쿠모 란은 주인이 예기치 않던 시각에 기상하자 그녀의 안부를 여쭈었다. 유카리는 종자가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물어올 때면 대개 “네가 알 필요는 없단다.”하고 받아쳤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란에게 자신은 지금 외출할 테니 집을 보고 있으라고 일렀다.

 

유카리는 곧장 스키마를 통해 하쿠레이 신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나고자 하는 인물은 물론 신사의 무녀, 하쿠레이 레이무밖엔 없었다. 신사 앞 마당을 지키고 있던 레이무는 유카리를 마주하곤 하품이 섞여 구멍난 발음의 인사말을 건넸다. 신사 본전 안에 등잔불이 밝혀져 밤이 깊은데도 주변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간에게 지금은 침소에 있을 시각이었고, 그건 무녀라고 다르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랬다.

 

이변이었다. 환상향이라는 작은 세계의 재난. 레이무가 밤잠에 들 수 없는 건, 무녀로서 이변 해결의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번엔 두 개의 이변이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발발했고, 두 이변 모두 며칠 째 해결되지 않고 있는 초유의 사태였다.

 

 

 

 

첫 번째 이변. 사흘 전부터 환상향 전역에 대량의 우표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누군가 우표를 흘리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우표가 자연 발생하다는 표현이 맞았다. 우표의 창궐이었다. 약음기가 달린 나팔이 그려진 우표였다. 그림이라기보다 기호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단순한 모습이었다. 우표마다 생김새에 미묘한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널부러진 우표 쪼가리가 환경과 미관을 해친다는 것 외에 별다른 피해는 없는 듯했으나, 현상이 이튿날까지 지속되자 비로소 사건은 이변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환상향엔 우표를 사용하는 근대적인 우편 시스템이 정착된 바가 없었다. 이 정도 규모로 인쇄를 벌일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세력은 한정적이었으므로, 용의 선상을 좁히는 것은 수월했다. 인쇄 시설을 보유한 요괴의 산이 우선적으로 지목되어 가장 먼저 들쑤셔졌고, 다음으론 로켓을 제조했던 전적이 있는 홍마관이 의심을 샀다. 인쇄기가 있을 듯하다는 명목으로 향림당 등도 조사받았으나 어디에서도 이변의 단서는 잡히지 않았다. 이후로 나팔 우표는 지금까지 환상향 각지에 출몰하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우표는 환상향의 것이 아니었다. 이변 발생 직후 스즈나안 대본소의 점장이 밝힌 이야기이다. 나팔 우표는 바깥 세상의 소설에 등장하는 ‘트리스테로’라는 가상의 단체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우표의 출처는 바깥 세상의 소설이었다. 문양의 디자인도 책에 삽입된 삽화와 같았다. 저명한 소설이, 그것도 소설 자체가 아니라 그 일부만이 환상들이 해온 문제에 대한 소견도 그녀는 덧붙여 이야기했다. 트리스테로의 우표은 소외 계층의 인간들이 비밀리에 편지를 부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그 개념 자체가 잊혀진다는 성질로서 정의되고 있는 점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환상을 불러들인다는 환상향의 특성이 유발하는 현상임이 드러남에 따라, 무녀는 이 사건을 더는 이변으로서 취급치 않기로 선언했다. 병리적인 일이 아니라 그대로 놔두어도 환상향이 유지되는 데에 해가 되지 않았고, 정 해결하고 싶어도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유카리는 팔짱을 낀 자세로 엄지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흰 장갑에 이가 닿은 곳에서부터 주름이 패였다.

 

“대결계가 느슨해지지 않았는지 확인해줘. 아무래도 바깥으로 영향이…”

 

“그야 당연하지. 결계를 치고 있는 무녀 본인이 며칠째 수면부족이니까.”

 

레이무의 반응은 다소 히스테릭했다. 말을 섞지 않고 용모만 살펴봐도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 눈동자가 위로 치올랐고, 눈자위가 느슨해졌다. 인간이면서도 강대한 힘을 가졌다곤 하나 어쨌든 인간의 몸이었다. 하물며 요괴조차 필요한 만큼 자지 못하면 피로를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계는 시간이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어. 환상향에 무언가가 흘러들어오는 만큼 결계엔 부담이 가해져. 트리스 뭐시깽이가 하필이면 이 시점에 환상들이 한 이유도, 단순히 이제 결계가 그 정도로 약소한 존재도 넘어올 수 있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봐.”

 

유카리는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그 둘이 마주보는 사이로 우표 한 장이 툭 떨어져내렸다. 둘의 시선은 모두 그것에게로 옮겨갔다. 유카리가 구두의 앞코로 그걸 짓밟았다. 발을 떼어내보면 우표는 거의 멀쩡했다. 바닥이 평평한 돌로 되어있어 구겨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발을 그리로 내리꽂았다. 포과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신사 일대의 땅이 떨렸다. 돌은 발길질이 꽂힌 데를 중심으로 해서 갈라져 들어갔다. 유카리는 얼마간 다리를 치우지 않았다. 우표는 그 가운데에 쑤셔졌다. 레이무는 상대의 발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조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신사 앞의 계단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곧 계단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케이네였다. 그녀는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한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레이무가 그녀를 부축했다. 케이네가 입을 열 때까지 신사엔 헛바람이 수풀을 헤집고 나아가는 소리만이 감돌았다.

 

“루미아가 인간들에게 퇴치당했다.”

 

두 번째 이변. 인간 마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텐구의 신문에서 환상향의 시스템을 폭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며칠 전에 루미아가 마을의 어린아이를 잡아먹은 일이 있었다. 본래 인간을 습격하는 요괴라도 마을 안의 인간은 손을 대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인간과 요괴 간에 적절한 인구비를 유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루미아는 오랫동안 외부에서 사냥감을 찾지 못해 굶주림을 참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요괴가 ‘룰’을 어기는 일은 종종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현자들 쪽에서 입막음 등의 조치를 취해왔다. 언론 담당의 텐구들 역시 인간을 식량으로 요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룰의 수혜자에 해당했다. 해서, 여태까지는 이러한 일들에 순순히 협력해오던 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변덕을 부린 것이었다. 실종된 것으로 여겨졌던 어린아이가 실은 루미아의 식인에 희생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제까지 자신들의 신문과 인간 마을에 가해졌던 정보 통제에 관한 것까지 기사에 실렸다.

 

인간들의 무리를 요괴 측의 무력을 앞세워 진압한다고 하면 간단했다. 그저 본보기로 몇 명만 죽여보인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잠잠해질 터였다. 하지만, 그건 이제 불가능해졌다. 그런 충격 요법은 전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자극함으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정말로 환상향의 인간들을 몰살할 수는 없었다. 요괴는 인간을 습격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충족하며, 그렇지 못한 요괴는 소멸한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인간 측은 텐구를 통해 이런 이치를 전해들었으므로, 요괴들이 자신들을 무턱대고 살생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환상향의 영역을 정의하는 대결계를 허물고, 인간들을 그 밖으로 되돌려줄 것을 요구해왔다.

 

*

 

메리는 어젯밤부터 몸에 힘을 넣지 않으려고 무진 신경을 썼다. 다행히 렌코는 맞은 곳이 얼얼해진 것 정도로 끝났고, ‘몸을 기울이다가 넘어가버리는 바람에 무게가 실린 것 같’다는 변명과 사과로 렌코가 수긍해주어 야밤의 소동은 일단락 되었다. 날이 밝고 나서 직접 렌코의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게 해 자신이 쳤던 부위를 확인했다. 멍이 들었다. 흰 살결이 죽 이어지는 팔의 어느 지점에 영락없이 거뭇한 자국이 남았다. 그건 ‘몸을 기울이다가 넘어가버리는 바람에’ 낼 수 있는 성질의 상해가 아니었다. 둘은 그 멍에 대해 서로 말을 아꼈다.  메리가 사과하지도 렌코가 괜찮다고 일러주지도 않았다. 아침엔 정말 필요한 대화만이 오고 갔다.

 

평일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수업에 출석했다. 렌코는 어젯밤 메리가 완독한 소설을 빌려와서 짬짬이 읽었다. ‘제49호 품목의 경매’라는 제목이었다. 이백 페이지가 겨우 넘는 얇은 책이라 낮 동안에 전부 읽을 수 있었다. 일부 교양 강의를 듣지 않고 책만 읽은 덕도 있었다. 렌코는 책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저자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의 교류와 사회학적 교류를 같은 어휘로 꿰어냈고, 그 은유를 통해 엔트로피 증가에 의한 종말을 피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렌코는 점심 식사에 동석한 메리에게 그렇게 소감을 들려주었다. 이 책에 대해서는 렌코가 메리보다 많은 것을 통찰한 듯했다. 메리로서는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했으니까.

 

“종말을 피하는 방법이라니. 난 그런 건 보지 못했는데.”

 

“명시적으로 적혀있진 않으니까.”

 

그들은 교토대학의 구내식당에 앉아있었다. 메리는 우동의 두꺼운 면을 한 가닥 씩 집어먹었다. 식당 벽의 한 켠에 놓인 텔레비전에선 기상 예보가 흘러나왔다. 메리는 잠시 그리로 눈길을 줬다. 오늘 밤은 보름달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종말을 막을 수 있는 거야?”

 

“교류야, 교류. 엔트로피가 무조건 증가하는 건 닫힌계에서의 이야기야. 다른 계와 상호작용하는 열린계라면 부분적으로 엔트로피가 감소할 수도 있어.”

 

메리는 닫힌계와 열린계라는 말에 대해 생각했다. 닫힌, 계. 열린, 계. 계. 계…. 일상 어휘라기보단 학술 어휘가 분명했다. 생소했지만 말소리로부터 대강 의미를 유추할 수 있어 따로 묻지 않았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음침한 메리는 좀 더 사람들과 교류를 가져야 한다는 정도의 논지니까.”

 

“그렇지 않으면?”

 

“엔트로피가 쌓이겠지.”

 

“어디에?”

 

“메리라는 닫힌계에.”

 

렌코가 젓가락을 메리의 우동 그릇으로 향했다. 건져낸 면이 테이블에 닿지 않도록 숟가락을 받쳐 입으로 가져다댔다. 자신의 규동을 내주겠다는 렌코의 권유를 메리는 사양했다. 속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렌코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녀가 늘 들고 다니던 포스트잇이었다. 그곳에 무언가를 그려넣기 시작했다. 메리도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어설프게 표현된 약음기가 달린 나팔의 문양. 렌코는 두 장을 뜯어 그렸고 한 장을 메리에게 내밀었다.

 

“트리스테로 우표야. 앞으로 하루에 한 장 씩, 거기 뒷면에 무슨 말이든 적어야 해.”

 

메리는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우표라는 게 거기다 직접 편지를 적는 물건은 아니었을 텐데. 메리는 얕은 웃음을 띄웠다.

 

“좋긴 한데. 트리스테로여야 할 필요가 있어?”

 

“모르는구나. 트리스테로는 말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소리를 내기 위한 창구였어. 그리고 닫힌계를 열기 위한 열쇠이기도 해.”

 

메리는 열쇠라는 말에 흠칫했다. 그 그림은 열쇠라고 생각하고 보자면 정말 열쇠처럼 보이는 면이 있었다. 나팔의 머리라고 생각했던 곳을 열쇠의 손잡이로 놓고 보면 그럴싸했다.

 

오늘은 메리의 귀가가 더 빠른 날이었다. 그녀는 일찍 잠을 청했다. 오후 일곱 시였고, 능선 위로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두 시간 뒤 돌아온 렌코는, 메리의 머리맡에 책을 돌려놓았다.

 

*

 

유카리는 렌코에게 받은 급조 우표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란이 그녀의 침소 앞을 지키고 있었다.

 

“란. 엔트로피라는 말을 알고 있니?”

 

유카리는 란의 인사말을 잘라먹었다. 유카리가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 없는 단어를 말하자 란은 흠칫했다.

 

“예. 자연현상의 계산에 필요한 것이라면 전부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럼 대결계 내부의 엔트로피는 언제 극에 달하지?”

 

“그건… 이 행성의 수명보다도 까마득한 시간이 지난 이후의 일일 테니, 유카리님이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란은, 그것보다도 어떻게든 대결계가 깨어지는 일이 더 빨리 도래할 것이라는 생각을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야. 이건, 그러니까. 일종의 은유랄까.”

 

“문학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야. 문학이 아니라. 사회학, 그런 거야.”

 

란의 대답이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엔트로피에서 은유를 경유해 사회학을 횡단하는 유카리의 인지도식을 파악해보려 애쓰는 중이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저 헛소리를 하는 건지도 몰랐고, 어쩌면 현자의 헤아릴 수 없는 직관인지도 몰랐다. 천체의 움직임조차 계산하는 그녀조차 이 인요의 속내만큼은 종종 단서를 잡을 수 없었다. 해서, “저는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가 언제나 란의 혀 밑에 들러붙어 말버릇이 된 것이었다.

 

유카리가 없는 낮 동안에도 마을의 봉기는 계속됐다. 퇴치 당했다던 루미아는 영원정의 조치로 회복되었고, 인간들도 영원정에까지 발을 들이밀지는 않아 일단 안심이었다. 트리스테로 우표가 원전에서 어떤 상징을 가졌는지가 스즈나안을 통해 밝혀지자, 들고 일어난 인간들은 그것을 부적과도 같이 여기기 시작했다. 소외된 인간과 그 분노의 상징이라는 점이 그들 자신의 형편과 맞아떨어지는 걸로 보였다고. 실제로 인간의 궐기와 우표 출현이 시작된 시기가 얼추 맞물리기도 했다. 현재 인간 마을에 발길을 향하는 요괴는 아무도 없고, 원래부터 인간 마을에 거주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카미시라사와 케이네 정도가 예외였다. 인간인 이자요이 사쿠야조차 요괴 측에 붙었다는 이유로 방문을 거부 당했다. 홍마관의 메이드는 흡혈귀에게 인육 요리를 내어온다는 텐구 신문의 선동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마을이 결집함에 따라 외각에서 인간을 습격하던 요괴들은 사냥감을 잃고 식량난에 허덕였다. 어지간히 강력한 요괴가 아닌 이상, 다수의 퇴마사가 모여있는 곳을 습격하기는 꺼려졌다. 약소 요괴는 되려 인간들에게 공격 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루미아의 경우처럼. 게다가 신령묘에서 봉기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전력이 붙으며 점차 인간들은 이쪽의 통제 역량를 벗어나고 있었다. 직접 인간을 지원하지는 않지만, 환상향의 지배층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옛 도시의 요괴들은 사태를 방관했고, 지령전에선 코메이지 사토리가 직접 “저희는 이번 이변에 개입할 의사가 없습니다.”라는 선언을 신문을 통해 전했다.

 

“그리고 지금, 봉기대가 퇴마사와 선인들을 앞세워 하쿠레이 신사로 향하고 있습니다.”

 

유카리는 가장 시급한 내용을 가장 나중에 이야기 하는 란의 보고 방식을 질타했다.

 

인간 진영의 동향에 눈치챈 몇몇 요괴들이 신사로 모여들었다. 봉기대에 선인이 합류한 것에 부담을 느꼈거나, 환상향의 유지에 별 관심이 없는 자들을 제하면 굵직하게는 그나마 묘렌사의 멤버 정도였다. 유카리는 스키마를 열어 봉기대보다 한 발 먼저 신사에 도착했다.

 

레이무는 토리이의 옆에 서있었다. 그곳에선 환상향 일대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제법 넓게 내려다보였다.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는 인파가 조그맣게 보였다. 이 세계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신사에서는 곧장 맞은편을 바라보면 일몰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낮은 각도로 쬐이는 빛에 의해 레이무와 토리이의 그림자가 길게 생겨났다. 길고 긴 그 그림자는 건너편 풀숲 속으로 늘어졌다. 유카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해. 같은 인간과 싸우게 해서.”

 

레이무는 답 할 말을 오랫동안 생각했다.

 

“딱 좋네. 나도, 네가 날 무녀로 심어둔 걸 원망해.”

 

결계의 전개, 이변의 해결, 요괴와 인간 사이의 조율. 무녀와 신사는 이 세계가 유지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유카리를 비롯한 현자들의 몫을 인간 소녀에게 분담한 것이었다. 이러한 위정은 조율자로 요괴가 아닌 인간을 내세울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다.

 

“괜찮아. 어차피 나는 여기 외에 있을 곳이 없어. 인간이면서도 너랑 같아. 꼭 누가 시켜서 이러고 있는 건 아냐.”

 

곧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레이무는 까치발을 들며 허리를 젖혔다.

 

“이번 이변을 막지 못한다고 너무 원망하진 말아줘.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은 현자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이 원인이고. 결계는 불안정해진데다 그걸로 누구 칭얼대는 것까지 상대해줘야 했고. 애초에 이변이 동시에 터져서 두 배로 정신이 없었다고.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던 거지. 낙오된 것들만이 모여든 얄팍한 세계가 평탄히 굴러갈 리가 없는데.”

 

레이무는 투덜거리며 신사 안으로 걸어 돌아갔다. 날이 저물어 등불을 켜려는 것이었다. 유카리는 중얼거렸다. 얄팍한 세계. 계, 계….

 

인간 측에선 토요사토미미노 미코가 정면에 나와있었다. 신사 입구를 중심으로 인파가 주변을 빙 둘러싼 형세였다. 요괴와 인간 진영이 대치하는 가운데 미코가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낙원을 표방하던 환상향은 오직 요괴만을 위한 낙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공존론은 인간을 현혹하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요괴들에게 있어 인간 마을의 본질은 사육장과 다르지 않다. 마을 경계를 나서 눈에 띄면 포식한다. 한꺼번에 먹어치우지 않는 것은 종의 유지를 위해서다. 그들은 바깥 세계에서 박해받아 온 요괴를 포용하는 상냥한 세계를 이야기 한다. 허나 그들이 이곳의 인간에게 내린 처우를 보라. 그들이 바깥에서 겪고 목격했던 악행을 같은 수준으로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인간의 핍박과 감금을 토대로 성립하는 요괴의 낙원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계를 해제하고 인간을 해방해라.

 

미코는 요괴들 앞에서 무사히 말을 끝마쳤다. 분위기는 한껏 험악해졌어도 물리적인 충돌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서로 섣불리 손대기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상공 저편에 제자리에서 날고 있는 카라스 텐구 하나가 유카리의 눈에 띄었다. 한 손에 들린 카메라의 렌즈가 지상을 향해 있었다. 허허실실 웃는 표정이 열받는, 보도 역으로 일하는 텐구였다. 텐구는 배신한 이후로 요괴의 산을 요새화 시켜두고 있어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단신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유카리와 눈이 마주친 텐구는 도망가기 시작했고, 유카리는 신사를 벗어나 발맞추어 쫓았다. 비행 속도로는 쳐졌지만 경계 조작으로 거리를 좁혀 간단히 붙잡을 수 있었다.

 

“산에 있는 녀석들은 어째서 갑자기 배신했지?”

 

“아야야. 야쿠모 씨에게 따라잡힐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대결계가 무너지네 마네 하고 있는 상황에 그런 건 별로 상관없지 않나요?”

 

유카리는 몸을 떨었다. 아랫턱, 주먹, 미간. 분노나 그에 근접한 것을 느낄 때 으레 긴장되곤 하는 부위들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텐구의 멱살을 붙들고 지상을 향해 곤두박치다가, 텐구를 앞으로 내밀어 지면에 메다꽂았다. 텐구는 마른 기침을 토했다.

 

“상관없지 않아. 말해.”

 

“…그냥. 산하에 있는 캇파들의 기술력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 같고. 텐구의 개체수도 꽤 불어나서 말이죠. 슬슬 바깥 세상에 나가도 인간들 옆에 한 자리 차지하고 살 수 있을 듯해서요. 이제 이런 촌구석에서 웅크리고 살 필요없다는 거죠.”

 

텐구의 셔츠 앞자락을 움켜쥔 손에 악력이 더해졌다. 옷 밑의 피부가 그녀의 주먹으로 조금 찝혀들어갔다.

 

“여기가 없어지면 곤란한 사람도 있단 말이야….”

 

텐구의 안면엔 다시 한 방 얻어맞기 전과 같은 웃음이 떠올랐다.

 

“요괴의 정체성을 떼어둘 곳이 사라진다면, 곤란하겠죠. 메리 씨는.”

 

유카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내뺐다. 유카리가 몸 위에서 비켜나오자 텐구는 곧바로 그녀에게서 벗어났다.

 

“맞죠? 바깥 세계의 당신은 요괴화 되어가는 인간. 요괴로서 경계를 조종하는 능력을 얻은 당신은 스스로를 요괴와 인간으로 각각 분리할 수 있었고, 요괴의 면모만을 환상향으로 흘러보내왔다. 그게 여기있는 야쿠모 유카리 씨. 만약 대결계가 허물어지면 이곳의 요괴와 바깥의 인간은 다시 한 몸이 되겠네요.”

 

유카리는 방금까지 린치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서, 잔뜩 동공을 키운 채 텐구를 바라봤다. 상체가 기운 탓에 옷의 앞섬이 아래로 늘어졌고, 품에 들어있었던 우표가 땅에 떨어졌다.

 

“텐구는 이미 바깥 세계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건가?”

 

“아뇨. 이 정도는 환상향 내부의 일만 잘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카라스 텐구들은 제법 집요한 파파라치거든요. 게다가 야쿠모 씨 본인이 그렇게 바깥 세계의 물건을 무신경하게 떨어뜨리고 다닐 정도이시니까.”

 

유카리는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일개 신문 기자에게 자신의 기저를 꿰뚫린 것에 대한 수치감을 느꼈다. 저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이 사실을 환상향의 모두에게 알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 마세요. 야쿠모 씨가 환상향을 이용할 수 있는대로 이용하듯, 저희들도 그렇게 할 뿐이니까.”

텐구는 날개를 움직여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유카리는 더 이상 좇거나 하지 않았다.

 

“아. 그래도 축하합니다. 오늘 대결계가 깨지는 일은 없겠네요.”

 

텐구는 하늘 어느 한 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날아가버렸다. 유카리는 텐구가 찌른 방향을 바라봤다. 어느샌가 달이 올라와 있었고, 오늘은 보름달이었다. 달빛이 뿜어내는 광기의 농도가 최고조에 달하는 형태였다. 거기에 쬐인 요괴는 평소 이상의 요력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신사에서 팽팽히 접전 중이었던 형세는 요괴 쪽에게로 기울었을 것이었다. 텐구의 말대로, 오늘 인간들은 대결계를 깰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유카리는 온몸을 붙박던 긴장이 풀려나감과 함께 무릎부터 쓰러졌다. 그리고, 요기가 충만해짐을 느꼈다. 피로해진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요기였다.

 

*

 

침대에 뉘여져있던 메리의 몸은 별안간 공중에 떠올라 천장을 정면으로 받아버리고 다시 이불 위로 쓰러졌다. 맞은편 책상에 앉아있던 렌코가 이쪽을 돌아봤다. 메리는 몸을 일으키며 두통을 느꼈다. 몸을 기대려 침대 모서리를 짚었는데, 그 목재 모서리는 간단히 뜯겨나갔다. 그곳에 체중을 싣고 있었던 메리는 그대로 고꾸라져 추락했다. 렌코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무엇보다도 메리가 다칠까봐 염려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멀쩡했다. 메리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부유했다. 두 사람 모두 갑작스러운 소란에 어벙한 채로 있었다. 메리는 곧 땅에 발을 디뎠다. 이제 보면 단발이었던 메리의 뒷머리가 허리까지 자라있었다.

 

렌코는 가장 가까운 방으로 도망쳤다. 화장실밖엔 없었다. 메리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보름달을 원망스레 쳐다봤다.


“렌코.”

 

메리는 문을 노크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당신은 메리야? 아니면 다른 사람?”

 

건너편의 좁은 화장실은 렌코의 목소리를 여러겹의 가느다란 음성들로 분할시켰다. 마지막 음성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메리야.”

 

메리는 문과 문틀의 사이에 입을 가까이 하고 말했다. 소리라는 건 이렇게 좁은 틈을 지나가, 건너편에선 그 공간 전체를 자신의 진동으로 메워버린다. 메리는 조심스레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렌코. 오늘 네가 준 트리스테로 우표를 잃어버렸어. 그래서 지금부터 말로 대신 하려고 해. 들어줄 거지?”

 

메리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천천히 생각했다. 그리고 닫힌 문을 향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다 쓰고 나서 안 거지만. 엔트로피의 최대화가 확정되어 있는 건 닫힌계가 아니라 고립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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