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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단편

내일이 뭐였으면 오늘이

이하루 - 2024.03.05.

 

 

  며칠 뒤, 가구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우리만 먼저 도착했다. 실수였다. 그건 오늘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였다. 가구는 며칠 뒤에나 들어올 거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오늘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지. 우련이 맞장구를 쳤다. 우련은 늘 성인이 되면 집을 구하리라며 입다짐을 부려왔고 정말 그렇게 했다. 그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욕실부터 살폈다. 나도 뒤따라 어깨너머로 들여다봤다. 그는 문턱 밖에 서서 안을 건너다봤다. 욕조가 있었다. 이 집엔 욕조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고 나는 말했다. 우련이 내게로 기우듬히 고개 돌렸다. 그대로 골똘하다가 반문했다. 욕조는 원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내가 욕실로 들어섰다. 열어둔 문가에서 우련은 기어코 비켜났다. 손을 씻다가 따뜻한 물이 나왔다.

 

  음료와 잔을 꺼내 맨바닥에 두었다. 이사를 밤새 기념할 셈이었다. 새집은 밝았다. 벽과 바닥은 하얗거나 그에 가까운 황갈이었다. 우련이 마루에서 너르게 팔짓했다. 바깥 창이 넓었다. 어둔 밤중인 게 다 보였다. 마루와 주방이 따로 있었다. 여기선 냉장고를 주방 밖 베란다에 내놓을 필요가 없을 테였다. 침대를 소파로 겸해서 쓸 필요도 없겠지. 침실이 있으니 침대는 거기에 놓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방문 하나를 열어젖혀 보이며 말했다. 그렇지. 우련은 등 뒤로 대답했다. 그는 마루를 전경처럼 한참을 돌라봤다. 나는 그를 불러 돌려세웠다. 여긴 어떡하지. 나는 또 하나의 방을 열어 보였다. 방은 두 개였다. 우련은 말을 헤매다가 창고를 제안했다. 며칠 뒤엔들 거긴 창고가 되지 않을 거였다. 우린 짐이 적었다. 우련은 이제 나를 쳐다봤다. 나도 우련만큼 오래도록 대답을 정하지 못했다. 집에 들일 침대는 하나였다. 어쨌든, 언제까지고 빈방이진 않을 거야.

 

  오늘은 침대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밤을 다 샐 수 있을까. 우련이 시들댔다. 나는 딴말 말고 상 차리기를 다그쳤다. 기념하잔 이야기를 꺼냈던 사람이 우련이었으므로. 책임져야 하는 거야? 책임져야지. 우리는 마루에 앉았다. 기념할 말은 단순했다. 집을 얻어 더없이 좋았고 좋다는 것 외에 뭐가 더 있을 리 없었고 그러니까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었다. 우련은 뭐가 없으니 바깥으로 나가자며 떠 물었다. 나가기엔 늦었고 나는 이미 졸렸다. 나는 함부로 솔직해진 다음 금방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 나는 겉옷을 두 겹 입고 있었다. 하나는 우련의 것이었다. 우련이 입고 있었던 모든 옷가지가 마루에 놓였다.

 

  우련은 물 받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나는 큰소리를 냈다. 우련이 쉽게 눈 떴다. 뜬 눈이 나슨했다. 거기서 나를 건너다봤다. 날더러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네가 못 일어나는 줄 알고,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너는 뭘 하는 거냐고. 너무 피곤했다고, 우련이 대답했다.

 

  그러면 안 되지.

 

  안 되는 건 없어. 오늘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는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에 앉아 욕조 턱에 팔을 괴었다. 수면 위에 혼몽한 증기가 가물가물 떠올랐다. 우련의 몸이 붕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 뒤, 아무것도 없을 순 없게 된다.

 

  그건 무슨 의미야?

 

  나는 대답을 떠올리는 사이 한순간 졸았던 것 같았다.

 

  의미가 있어.

 

  나는 물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물결이 떨었다. 그 속에서 우련의 몸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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