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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단편

바나나는 하나의 바게트가 되고 싶었어

양서토 - 2023.11.28.

 

 

  나는 멋쟁이 바나나. 내 꿈은 바나나 바게트가 되는 거였어. 중학교 시절, 옆 반에 바게트가 있었어. 그것도 멋진 바게트가. 그 애는 따끈하고 밀의 냄새가 났어. 녹말이 많은 사람들은 대개 그래. 모두와 잘 어울리고 어울리는 사람까지 돋나 보이게 하지. 나는 그 애를 찾아가서 말했어. 나는 바나나 바게트가 되고 싶다고. 나와 함께 해달라고. 그 애는 놀랐던 것 같아. 쩌적, 크러스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지. 그리곤 대답도 해주지 않고서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어. 다음날에 나는 선생님에게 불려 가게 됐어. 거기서 선생님이 대신 대답을 해주더군. “너는 바나나야. 걔는 바게트고. 바나나거나 바게트거나 둘 중 하나야. 바나나 바게트가 될 수는 없어.” 그렇지만 나는 무화과 바게트를 봤던 적도 있는걸. 그건 선생님의 생각일 뿐인 거야. 내 입은 비죽 튀어나왔고 나는 그걸 숨기려 고개를 숙였어. 선생님에겐 내가 끄덕이는 걸로 보였겠지. 학교에선 꿈을 함구하고 지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미성년일 동안 나는 어떤 바게트에게도 솔직해보지 못 했어.

 

  어른이 된 나는 한철 완숙해졌어. 갈수록 내 몸은 마냥 망실망실히 자라났고, 나는 그게 아깝다고 생각했어. 나는 당장이라도 끝내주는 바나나 바게트가 될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이 시절을 놓쳐버린 뒤엔 멋진 바나나 바게트는 영영 못 될 것만 같아 마음이 졸았지. 막 해를 쇠며 성년이 되던 날 밤, 나는 어느 바게트와 함께 있었어. 학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바게트였어. 심야 영화를 보고 나와 산책을 하던 중이었어. 추운 공기에 굳은 그 애의 겉층이 매걸음마다 낙엽 같은 소리를 냈어.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걔는 아마 내 밑마음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그 생각이 긴장을 풀어주었어. 그래서 나는 겨우 말할 수 있었지. 네가 나와 바나나 바게트가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바사삭 소리와 함께 우리는 멈춰 섰어. 걔가 날 또라지게 바라보다가 쏘아붙였어. 우리가 어울리는 건 이상하다고 말이야.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성이 같잖아.” 그 말은 사실이었어. 우리 둘 다 성이 였으니까. 그렇지만 그게 이상한가. 아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좋은 한 쌍인데 말야. 그 애는 학원에 가서 내 비밀을 온통 퍼뜨려 버렸어. 학교 공부가 끝났으니 더는 다니지 않을 곳이었지만, 만일 학기 중이었다면 정말 아찔했을 거야. 이제 학원 친구는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학원의 어느 바게트가 내게 연락을 해왔어. 바나나 바게트가 되길 원하느냐고. 실은 자신도 그렇다고.

 

  우리는 당장에 바나나 바게트가 되기로 했어.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걸까. 바게트도 나도 알지 못했어. 바나나 바게트가 어떤 건지 실제로 본 적이 없었어. 바게트는 자신에게 긴 칼집을 내어 내가 그리로 들어가면 될 거라고 말했어. 나는 그래선 바나나 바게트가 아니라고 말했어. 그건 차라리 바나나 핫도그처럼 보이잖아. 다른 방안이 있냐며 바게트가 내 생각을 물었어. 내 생각엔 바게트를 어슷 썰고, 또 나는 송송 썰고, 그렇게 조각이 된 우리가 포개어 겹쳐지면 될 것 같았어. 바게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건 바나나 샌드위치라고 화를 냈지. 우리는 계속 고민했지만 끝내 조율하지 못했어. “바나나 바게트는 뭘까.” 헤어지면서 바게트가 뇌까렸어.

 

  나는 제빵소를 탐문 다녔어. 빵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봤지. 바나나 바게트가 있는지 말이야. 판판이 그런 건 없다고들 잘라 말했어. 바나나 바게트가 뭔지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어. 나는 공연히 바나나 바게트를 찾아 헤맸어. 그러는 동안 내 몸은 점점 흐무러져 갔지. 푹 익은 살에 검은 멍이 들기 시작했어. 결국 나는 바나나 바게트가 될 수 없었던 거야. 어두운 바나나는 바나나 바게트가 될 수 없겠지. 그제서야 나는 바나나 바게트가 무엇인지 알게 됐어. 어느 제빵소 주인이 답을 들려줬어. “바나나 바게트는 바게트야.” 나는 이해가 안 돼서 되물었어. 그건 바나나 바게트는 나 같은 과일이 아니라 빵이라는 의미였어. 제빵소 주인은 제빵소가 아니라 주인인 것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바나나 바게트에는 바나나도 들어가는걸. 내가 보채자 그는 다시 비유를 들었어. “너는 제빵소에 찾아왔어. 그게 과일이었다면 너는 청과상으로 갔겠지. 실은 너도 알고 있어. 너는 네가 아니라 바게트가 되고 싶은 거야.” 거기서 나는 깨달았지. 내가 그 모든 바게트들에게 끌렸던 이유를 말이야.

 

  나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어. 처음부터 난 바나나 바게트가 될 수 없었을 뿐이야. 바나나 바게트는 바나나가 아니라 바게트가 하는 거였으니까. 나는 제빵소 주인에게 이곳에 밀을 대주는 밭이 어딘지를 알아내서 그곳을 향했어. 과숙된 나의 몸은 걸을 때마다 쉽게 짓물렀지. 한때는 그게 날 불안하게 했지만 이제는 괜찮았어. 밀밭에 닿았을 때, 나는 맥이 다 풀려서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어. 그대로 밭의 흙에 쓰러졌어. 바닥에 쓸린 껍질이 트였고, 나른한 속살이 드러났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이대로 가만히 물크러져 가겠지. 그러면 흙으로 스며들게 되겠지. 무르녹은 나는 여기 있는 밀과 한 몸이 될 거고. 그러면 언젠가 나는 제빵소에 보내져 빵이 될 수도 있을 거야. 머리가 녹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 나는야 바게트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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