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식일 연작

유인

이하루 - 2024.05.07.

 

 

  어디로 가냐고 한주가 물었다. 앞서가던 미채는 조촘 걸음을 그쳤다. 악기 가방이 덜컥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높은 가방이 옆얼굴을 온통 가렸다. 한주는 미채를 지나쳐 앞으로 돌아갔다. 미채는 고개 돌린 그대로 뒤편에 마냥 곁눈을 뒀다. 모르겠다, 이사라고만 들었을 뿐, 미채는 더이상은 알지 못했다. 미채가 슬몃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불퉁한 길 위에서 걸음새가 기우뚱댔다. 한주의 옆을 가직히 지나쳐 갔다. 비켜 나온 길 멀리에서 사람이 오고 있었다. 한주는 입을 우므렸다.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그는 금방 미채를 뒤쫓았다. 등 뒤에서 미채를 잡았다. 가방을 붙당겼다. 미채의 어깨선이 단박에 비뚜로 쏠렸다. 가방이 치우치는 대로 미채는 쉬이 기울었다. 한주는 눈을 지르감았다. 눈뜨면 미채가 쓰러져 있었다. 미채에게 다가가 옆에 꿇고 앉았다. 다친 데를 살폈다. 무릎이 땅에 길게 쓸렸다. 상처에서 넘친 피가 아랫다리로 쏟아졌다. 다리를 붙든 손을 타고 넘어왔다. 한주는 와락 손을 떼어냈다. 미채가 바닥을 짚으며 띄엄띄엄 일어섰다. 발목께로 흐른 피가 신발에 먹어 들었다. 걸을 수 있겠냐고, 한주가 물었다. 미채는 다리를 내려다봤다.

  미채와 한주 사이로 어른 남자 한 명이 들어섰다. 뒤에서 오던 사람이었다. 눈을 가라 뜨고 다친 다리를 흘겨봤다. 미채에게 긴 그늘이 들었다. 고가도로 너머에서 하늘이 붉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넘어졌느냐며 나무랐다. 미채는 피 흘리는 아래에 고개를 붙박아뒀다. 한주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넘어졌던 자리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에 악기 가방이 떨어졌다. 저것이 무거웠다고, 한주는 말했다. 남자는 상처를 보며 탄성을 했다. 가만 둬선 안 된다고 말했다. 벌어진 상처로 균이 들어갈 거랬다. 병원으로 가야 했다. 한주는 두리번댔다. 근처엔 문 닫힌 단층 건물들과 검누른 밭이 있었다. 한주는 눈길을 성마르게 돌려댔다. 가자. 남자가 미채의 손을 쥐었다. 미채는 이끌려 갔다. 다친 다리를 머뭇대다가 앞서나간 외발을 종종댔다. 비끗하고 휘청였다. 뒷발을 가쁘게 내디뎠다. 자갈 긁히는 소리가 났다. 한주가 먹었던 숨을 헉하고 내쉬었다. 남자가 한주를 돌아봤다.

  어디에 가냐고 한주가 물었다. 병원에 데려갈 거랬다. 감감했던 도로에 차가 지나갔다. 팔에 바람이 감겼다. 밭둑에서 큰 새가 도망쳤다. 미채는 도로 쪽에서 비켜 옮겨서려 했다. 남자는 미채의 팔목을 굳이 쥐었다. 미채가 남자를 올려다봤다. 더 이상 차는 없었다. 남자가 눈길을 한주에게 향했다. 미채도 한주를 바라봤다. 한주는 신발코로 바닥을 거푸 쪼아댔다. 가야만 하나. 한주는 똑바로 서려다 한 발짝 물렀다. 바로 가야 한다고, 남자는 잘라 말했다. 미채가 손을 뻗었다. 되돌아오려다가 남자의 손안에 매여 멈췄다. 미채는 저기에 가방을 떨어뜨렸다고 했다. 한주가 그것을 주웠다. 주우려다 놓쳤다. 무게에 놀랐다. 도로 주워다 미채에게 다가갔다. 미채가 한 손으로 잡아 들었다. 그리곤 못 버텨 내려뜨렸다. 남자는 그럴 틈이 없댔다. 다시 앞으로 걸음을 떼며 미채를 들이끌었다. 다음에 돌려받으랬다. 한주가 얼른 가방을 거두어 안아 들었다. 그 새에 그들은 멀찌감치 떨어졌다. 미채가 말했다. 지금이 끝이에요. 미채는 한주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평지 길에서 오랫동안 멀어졌다.

  길에 더러 아이들 무리가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방과후 교실의 하교 때였다. 한주는 고개를 세웠다. 동급생이 지나치다 말고 알아봤다. 그거 미채 거지. 그가 한주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켜 물었다. 한주는 손끝을 따라 자기 몸을 굽어봤다. 웃옷 끝자락이 피가 묻어 미워져 있었다. 손을 댔더니 덜 마른 데가 번져나갔다. 미채 꺼. 한주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동급생이 대답을 보챌 동안 한주는 뜸들였다. 무릎 사이로 기타의 목 부분이 삐져나왔다. 거길 양팔로 감쌌다. 한주는 그걸 자기 것이라 대답했다. 그렇냐고, 동급생은 낭랑히 응했다. 그리고 또다시 물었다. 여태 집에 가지 않느냐고. 한주는 불쑥 발을 뗐다. 달리기 시작했다. 쳐진 가방이 자꾸만 짓찧었다. 등 닿은 데에 땀기가 돋쳤다. 한주는 금방 지쳤다. 반대편에 여전히 동급생이 보였다. 모퉁이에서 옆길로 헛돌았다.

 

  귀갓길 도중에 미채네 집이 있었다. 현관 앞엔 노란 테이프에 휘감긴 가구와 상자들이 어석더석 내놓였다. 집 맞은편 담벼락에 기대 내려앉았다. 가방을 끌러 옆편에 붙여 세워뒀다. 골목 끝에 트인 큰길을 흘긋거렸다. 머지않아 하교 인파는 끝났다. 줄창 빈 길을 지켜봤다. 집 안에 등불이 들어왔다. 한주는 주변을 둘러봤다. 하늘에 아직 붉은빛이 났다. 얇게 구긴 눈에 손차양했다. 곧 현관이 열렸다. 안에서 동급생이 나왔다. 집안에 인사를 남기고 돌아 나왔다. 맞은쪽에서 한주와 맞닥쳤다. 문지방에서 나오다 멈췄다. 현관 안쪽에서 다시 사람이 나섰다. 동급생이 그를 미령, 언니라고 불렀다. 미령은 한주를 넘겨다봤다. 미령은 키가 높고 교복 차림이었다. 미채보다 연상인 모양이었다. 한주는 그들 양편마다 시선을 번갈았다. 마냥 빗가다가 어디에도 마주치지 않았다. 동급생이 미령에게 쟤는, 하고 한주의 이름을 댔다. 미령이 쟤가, 하고 알아들었다.

  한주는 일어서려 했다. 어중뜬 데에서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미령이 먼저 다가왔다. 미채를 찾아왔냐며 물었다. 한주는 입을 벌렸다가 사뭇 끄덕이기만 했다. 목이 벽에 닿아 바듯했다. 자세가 뒤뜨며 배가 말려 들어갔다. 벽에 배후를 몰아 허리를 받쳐 세웠다. 더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한주가 숨이 트여 부연했다. 미령이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한주의 목전에 다가들었다. 왜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니. 미령에게 문득 눈을 마주쳤다. 흰자위가 훤했다. 미채를 닮았다. 한주가 빈입질을 삼켰다. 미령이 가방 쪽에다 턱짓을 보냈다. 돌려주러 왔니. 한주는 가방을 더듬어 잡았다. 팔놀림이 몸에 붙어 바투 오므라졌다. 집을 넘겨다봤다. 미령이 크고 가까웠다. 뒤를 다 가리었다. 한주는 고개를 내리눌러 깔았다. 그러다 목이 우뚝 멎었다. 그건 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데에서 동급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미령이 가방을 흘겼다. 그렇니. 한주가 얄찍히 고개를 도리 틀기 시작했다. 미령은 일어섰다. 그리고 하늘로 흠신을 폈다. 한주는 숙인 몸을 거두어 들었다. 앞에 불나간 집이 보였다.

  집에 미채는 없댔다. 그럼. 한주가 말을 낮게 흘렸다. 그리고 입을 내리다물었다. 말은 거기서 설었다. 난들 알까. 동급생도 미채를 찾아왔다가 허행히 돌아가던 참이랬다. 한주가 일어섰다. 집 쪽을 향한 채 멀뚱댔다. 동급생이 같이 돌아갈까 하며 팔꿈치를 찌긋댔다. 한주는 버텼다. 자긴 아직 통금 시간이 되지 않았댔다. 동급생이 그럼하며 대받았다. 그럼 계속 기다릴 테냐고. 미령이 가방을 챙겨 들어 한주에게 안겼다. 가방이 맞지 않아 벗겨져 내리려고 했다. 한주는 어깨놀이를 누차 들썩였다. 빗장뼈가 잡아맨 어깨끈에 눌렸다. 미령이 그들을 등 떠밀어 배웅했다. 한주는 등짐 지느라 쉽게 휩쓸렸다. . 미령은 그렇게 인사했다.

  그들은 길이 갈라질 때까지 함께 내걸었다. 이다음 주택가가 나왔다. 거기서부턴 갈 방향이 달랐다. 그들은 갈라섰다. 한주는 제 집에 가는 길목에서 멈춰 섰다.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한주는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교문은 열려 있었다. 운동장에서 공 차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한주는 조회대 앞을 잰걸음 쳐 지나갔다. 학교는 소등됐다. 고층의 창문들 몇 군데에 점점이 불이 밝혀졌다. 실내화를 꺼내렸다. 고무 밑창이 대리석 바닥에 치받혔다. 일 층이 길게 울렸다. 실내화는 다시 집어넣었다. 계단을 올랐다. 매 걸음이 되울렸다. 다른 인기척 같아 귀가 가려웠다. 한주는 더러 뒤를 돌아보며 제 반으로 찾아갔다. 복도에서 까치발을 서서 교실 안을 넘어다봤다. 교실은 비었다.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채의 자리로 갔다. 책상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거긴 오늘로 치워졌다. 가방을 벗었다. 내려놓다가 가방 바닥을 찧었다. 가방 안에서 악기의 울림통이 낮게 공명했다. 한주는 가방째 악기의 목을 쥐었다. 싸매어 소리를 멎게 할 셈이었다. 소리는 부단히 진동했다. 한주의 양손에 떨림이 옮아갔다. 가방이 바닥을 떴다. 현의 요철이 바득 어긋났다. 한주는 손힘을 확 풀었다. 문 쪽을 돌이켜봤다. 문을 열어둔 채 들어왔었다.

  미채의 자리에 악기를 놓았다. 문을 닫고 교실에서 나왔다. 가는 방향 저편에서 대화가 들렸다. 한주는 복도가 꺾이는 곳에서 몸을 붙였다. 학년 교무실 앞에 두 사람이 나와 있었다. 미령이었다. 미령이 담임 교사를 찾아왔다. 오가던 말 중에 미채의 이름이 나왔다. 미채는 제시간에 하교했다고, 교사가 말했다. 구둣발이 달각였다. 가까워져 오는 기척이었다. 한주는 반으로 돌아갔다. 뒷문을 미느라 문바퀴가 굴렀다. 교사가 누구라며 눈치를 냈다. 걸음발 소리가 좁아졌다. 한주는 악기 가방을 다시 챙겨 들었다. 너즈러진 끈이 거리꼈다. 내휘둘린 가방에 책상이 치였다. 책상과 의자 사이가 헤벌어졌다. 한주는 자리에서 물러나 교탁 쪽으로 비켜섰다. 덜 열린 뒷문이 다 열어젖혀졌다. 교사가 왔다. 한주는 외팔로 매고 있던 가방을 맥 놓아 주저앉혔다. 그리고 미령이 들어왔다. 교탁 귀가 허리춤에 찔렸다.

  한주는 잊고 간 게 있다고 말했다. 목 안에 헛숨이 끼어들었다. 어깨를 내리고 손을 포개 모았다. 미령이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교사도 뒤따랐다. 열에서 틀어진 책상을 미령이 제자리로 다듬어 넣었다. 미채 거잖아. 교사가 꼬집었다. 한주 쪽을 가리켰다. 한주는 말을 한숨 머뭇했다. 그건 걔 거예요. 그 새에 미령이 답을 가로챘다. 교사가 재차 되물었다. 한주는 끄덕였다. 너희는 같이 돌아갔어. 한주는 내리 끄덕였다. 그러면서 미령을 보고 있었다. 미령은 울울히 줄지은 책상을 걷으며 한주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어디로 갔지. 교사는 계속 한주를 불렀다. 한주는 내려놨던 가방을 챙겼다. 어깨끈에 팔을 꿰어 넣었다. 매고 들려다 가방 쪽으로 허리가 말려들었다. 몸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미령이 덜미를 잡아 세웠다. 한주는 기울던 채로 멎어 섰다. 무겁지. 미령이 말했다. 한주의 앞에 휘늘어진 그림자가 온통 미령의 거였다. 뒤를 돌면 창가로 낮아진 석양이 보였다. 한쪽 볼에 후더운 햇살이 내렸다. 끈이 얽힌 등에 땀기가 돋쳤다. 미령이 손을 놓았다. 한주는 마저 한 발짝 흔들렸다.

  한주는 그들을 따라 교실에서 나왔다. 찾았니. 미령이 물었다. 잊고 간 것. 한주의 입이 아 벌어졌다. 아니, 찾지 못했다, 순순히 말을 맺었다. 교사가 문을 잠갔다. 미령이 유리창 건너로 교실을 응망했다. 한주에겐 눈높이를 넘겼다. 밑에서 빗본 유리엔 태양색만 납작했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한주가 제풀로 타일렀다. 교실 쪽 복도 전등이 내려갔다. 길이 꺾여 들어간 데에서 빛이 샜다. 교직원들이 돌아갈 준비로 술렁였다. 한주는 가려다가 멈춰 섰다. 도중에 미령을 기다렸다.

  교사가 미령에게 밭게 말 붙였다. 미채 이름이 나왔다. 미채는 제시간에 하교시켰다고. 교사는 말하면서 한주에게 일견 눈짓을 돌렸다. 미령은 가만 눌러들었다. 교사는 더 말하지 않았다. 미령은 듣던 자세 그대로 묵연히 대했다. 교사는 한주에게 시선을 틀었다. 미령이 한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딴 길로 찾겠습니다. 한주는 미령에게 끌려 인사할 새 없이 돌아 나왔다. 어떻게요. 한주가 물었다. 보폭을 따르느라 걸음이 조조했다. 잡힌 팔이 몸에서 앞서나갔다. 너는. 미령은 잠깐 멈췄다. 너는 어떻게. 그리고 걸음을 늦췄다. 한주에게도 느렸다. 그들은 잠자코 계단을 내려갔다.

  한주. 운동장에서 그를 불렀다. 아이들이 계단석을 치달려 왔다. 아까보다 머릿수가 모자랐다. 외짝 골문만으로 공을 놀고 있었다. 팽개진 공이 헛딴데로 굴렀다. 한주를 끼워주겠다며 꼬드겼다. 한주는 위를 봤다. 시계탑이 등 보는 방향이었다. 미령이 안 된다며 말거리를 치웠다. 오늘 내로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주의 팔을 퉁겼다. 한주는 끌려 나간 다리를 고쳐 디뎠다. 근변에서 나무가 우실거렸다. 아이들은 늦게서야 미령을 두고 기미를 살폈다. 중학생. 누군가가 튀어 말했다. 고등학생. 아이들이 서로 팔꿈치를 찔렀다. 잔말을 금한 채 머무적거렸다. 골대 지키는 아이가 그들을 재촉하러 소리 질렀다. 미령은 한주를 데리고 갔다.

  미령은 너희가 갔던 길로 가자고 했다. 후문 방향이었다. 그들은 교문을 건넜다. 때마다 한주가 방향을 일러줬다. 미령은 듣지 않은 채 미리 가로질렀다. 한주는 굳이 길을 짚지 않았다. 미령은 알아서 찾아갔다.

 

  한주가 그만 설 낌새였다. 그들은 멈췄다. 밭 옆길이었다. 한주는 알렸다. 여기서 미채와 헤어졌다. 미령이 주변을 휘둘러봤다. 여기냐고 따라 물었다. 두고 간 것. 한주는 괜한 두말인 셈 따로 대꾸하지 않았다. 미령의 시선이 골독히 한데에 모였다. 익은 방향이었다. 손 들어 그쪽을 가리켰다. 집 방향이랬다. 불쑥 쳐든 팔짓에 한주는 흠칫했다. 미채도 그리로 다녔다며 어망결에 말을 맞췄다. 너는 어디로 갔지. 한주는 똑같다고 직답했다. 집으로 갔다. 네 집은 어딜까. 한주는 잔기침했다. 헛숨이 끓었다. 들먹이는 어깨에 미령이 손을 얹었다. 팔이 반대편 어깨까지 에웠다. 저는. 팔을 헐겁게 치키기 시작했다. 검지 끝을 밑으로 굽게 말았다. 방금 전 방향에서 시선을 피했다. 팔이 다 곧았다. 곁길을 골랐다. 다녀본 적 없는 길이었다. 밭이 금세 끊기고 철물상이 늘어섰다. 그쪽으로 한동안 건물이 낮았다. 바로 하늘이 트였다. 낙조가 다 끝났다. 집이 멀겠네. 미령이 그리로 걸음을 떼었다. 한주를 앞세워 보냈다. 하지만. 미령이 귀를 팔았다. 한주는 말없이 길잡았다.

  초등학교가 나왔다. 한주가 뒤를 살폈다. 미령이 학교를 눈여기고 있었다. 한주가 자길 살펴보길래 그만 거뒀다. 눈맞춤이 길다가 한주 쪽에서 피했다. 주변에서 쇠 방울이 울었다. 좁은 길에서 순찰이 다가왔다. 순경은 두 사람 앞에서 자전거를 내렸다. 둘 사이로 가르고 들어왔다. 한주가 바깥으로 비켜났다. 순경이 바듯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전거에 되오르며 둘을 훑어봤다. 미령이 묵례하자 지나쳤다. 보낸 뒤에도 미령이 여전히 웃었다. 볼웃음 한 채 한주에게 마주 봤다. 한주는 괜히 웃음을 맞췄다. . 감쳐물던 입 안이 터졌다. 모르겠다고만 했다. 모르겠다구요. 몸을 굽혀가며 고개를 저었다. 쿡쿡거리다가 너털지게 번졌다. 몸 떨던 한주가 가방에 몰렸다. 울타리에 걸쳐 쓰러졌다. 저편에서 쇳소리를 끌며 자전거가 멈춰 섰다. 무겁지. 미령이 한주의 팔을 뽑아 당겨 일으켰다. 걸음새가 한결 느려졌다.

  정지 신호에 걸렸다. 붉은 신호가 계속됐다. 붉은 쪽 전광만 무디 끔벅거렸다. 한주는 선을 밟고 기다렸다. 짝지어 교차하는 찻길의 신호가 두 차례 바뀌었다. 보도도 차도도 한동안 비었다. 고장 난 거야. 미령은 건너라고 부추겼다. 한주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차로의 신호를 다시 허송 보냈다. 미령이 무릎에 손 짚으며 낮게 숙였다. 한주와 눈높이가 맞았다. 이 길이 아니냐고 물었다. 한주는 옆길을 둘러볼 양 얼굴을 틀었다. 가로등에 쳐진 벌레 실에 날벌레가 잡혔다. 한주가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들은 밭길로 돌아왔다. 반대편에서 사람이 오고 있었다. 어두워 가물거렸다. 한주가 멈췄다. 행인이 조명에 들어섰다. 어른 남자였다. 여기냐고 미령이 확인했다. 여기가 돌아온 거냐고. 한주는 저쪽에 시선을 팔렸다. 미령이 붙어 섰다. 몸을 낮춰 한주의 얼굴을 가까이 들였다. 남자가 옆으로 지나갔다. 한주와 미령을 힐금했다. 돌아본 미령이 그와 마주쳤다. 남자가 발을 끌었다. 어두운 데에서 서로 장목했다. 미령의 젖힌 목에 힘줄이 일어났다. 남자는 멀어지다가 다시 앞을 보고 갔다. 한주는 성량을 조심하며 말했다. 여기도 아니라고. 그러나 한주는 여기서부터 혼자서 갈 수 있다고 털어놓았다. 미령은 안 된다 막았다. 혼자 보내긴 늦었다. 그러기엔 아직 어렸다.

  어디로 가려고. 미령이 어깨를 잡았다. 가방끈이 어깨에 덧깔렸다.

  한주는 뿌리치고 달려 나갔다. 들뜬 가방이 진탕했다. 엄지로 끈을 악쥐었다. 미령이 쫓기 시작했다. 쉬이 한주를 따라붙었다. 한주는 몸을 되는대로 앞으로 몰아갔다. 몸이 자꾸만 뒤젖혀지려 했다. 한주는 금방 속도를 잃었다. 달리려는 몸짓만 버텼다. 미령이 손목을 낚아챘다. 한주는 미끌린 다릿짓을 놓아버렸다. 미령에게 매달린 채 쓰러져 내렸다. 어디선가 은연히 흙바닥 문질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한주가 마른 입 안을 삼켰다. 너부러진 제 다리를 멍하니 두고 봤다. 미령이 부축을 들며 바르게 앉혔다. 한주가 부딪힌 쪽의 다리를 굽혀 세웠다. 쓸린 무릎에서 피가 나왔다. 한주는 병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큰 병원이 열었다. 다른 곳은 늦어 문을 닫았다. 처치실에서 반창고를 댔다. 어느 틈에 윗몸에도 다친 데가 있었다. 팔을 보려 소매를 걷어 올렸다. 어깨에 불그스레 눌린 자국이 굻었다. 처치는 몇 분이 채 안 걸렸다. 이게 다냐고 한주는 확인했다. 달리 불편한 게 있는지 반문 받았다. 걸터앉은 데에서 발이 바닥에 떴다. 한주는 병상에서 한 뼘쯤 뛰어내렸다. 나가는 길에 열린 문틈으로 입원실 안이 건너 보였다. 가로누인 어른의 발들이 커튼 밑으로 삐져나왔다. 한주는 문 앞에서 병상을 빠짐없이 셈했다. 모두 어른 키였다. 먹는 약이 처방됐다. 처방전은 미령이 수령했다. 항생제랬다. 미령이 맡아뒀던 가방을 한주에게 내밀었다. 한주는 바로 못 알아듣고 서슴대다가 둔하게 되받아 들었다. 제때를 지나 기타를 맡긴 것에 감사 인사했다. 미령이 고치고 들었다. 그 가방은 기타가 아니라 베이스랬다. 한주는 외마디로만 답했다. 베이스. 성기게 이름을 받아 외었다. 그건 더 무겁고 더 낮은 소리를 낸다. 미령이 묵묵히 웃음 쳤다.

  병원 옆에 약국이 붙어있었다. 입구 주변에 단것들이 진열됐다. 한주더러 원한다면 골라도 좋댔다. 한주는 입구에서 감돌았다. 미령은 처방전을 가져다 냈다. 약사가 약을 꺼내와 용법을 늘어두기 시작했다. 미령은 매대에 팔을 괴고 들었다. 문이 열리고 손님이 찾아왔다. 한주는 밖으로 나갔다. 도어벨이 엇박을 덧쳤다. 건물 사이의 샛길로 곧장 꺾어 들었다. 실외기 배후로 돌아가 벽에다 몸을 찰핍했다. 한주. 자기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들었다. 나직한 어조가 한 번 호명했다. 양쪽 외벽이 음성을 여러 겹 되울렸다. 한주는 제 가슴을 다잡아 숨죽였다. 두 번째를 기다렸다. 밖에선 딴소리만 들렸다. 제때를 넘긴 것 같았다. 찾는 소리는 더는 없었다. 한주. 그가 스스로 이름을 발음 지어봤다. 벽 밖으로 몸을 뺐다. 거리는 비었다. 한주는 빈 거리를 의심하며 거듭 되살폈다.

  한주는 밭둑에 앉았다. 방치된 잔풀이 파삭댔다. 벗어낸 가방이 잡을 새 없이 땅에 찍혔다. 그리고 엎어졌다. 앉은 자리가 둔탁히 떨었다. 가방을 열었다. 베이스가 뉘었다. 받침대가 목을 댔다. 목부터 잡아 꺼내 들었다. 남은 팔로 몸체를 안았다. 몸체의 오목한 굴곡을 허벅다리 위에다 맞물려 올렸다. 울림통의 현 위에 엄지를 댔다. 현이 억셌다. 엄지 밑에 검지를 덧댔다. 손목을 구부려 각을 맞춰보려 했다. 어디에 대든 현은 불편했다. 한주는 들입다 현줄을 그었다. 긁히는 소리뿐이었다. 울림통은 고요했다. 손톱 주변 살이 쓰렸다. 끊어버린 것 같았다. 베이스 앞면을 돌려 지판을 확인했다. 줄은 변함없었다. 꽁무니에 있던 가방을 옆으로 끌어왔다. 안에 베이스를 돌려놓았다. 손이 가방을 쳤다. 가방이 움직여 비탈로 넘어갔다. 베이스가 내리막으로 굴러갔다. 구렁에서 악기의 소리가 울렸다. 한 발을 비탈에 내디뎠다. 발이 못 버티고 미끌렸다. 밑은 그늘져 보이지 않았다. 한주는 내렸던 다리를 거두었다.

  현관에 없던 신발이 놓여있었다. 한주가 신을 벗어 나란히 맞놓았다. 엇비슷한 크기였다. 현관으로 모친이 동동걸음치며 나왔다. 한주가 돌아왔다. 모친은 전화에 대고 전했다. 텔레비전이 음소거 된 채 번적였다. 마루에서 소파 거죽이 비빚거렸다. 모친은 다음 전화를 잇달아 걸었다. 한주가 고개를 내밀어 마루를 건너보려 했다. 모친이 등을 두들기곤 집안 쪽에다 손짓했다. 통화로 입이 바빴다. 한주는 안으로 들어갔다. 냉방 기운이 돌았다. 미채가 앉아서 졸고 있었다. 눈이 떨다가 곧 뜨였다. 금방 뜨인 눈이 대번에 한주를 맞췄다. 한주는 깨워놓고 물러났다. 미채는 일어섰다. 무릎이 흰 천에 싸여 도도록했다. 미채가 손바닥을 열어 들었다. 잊었지. 한주는 제 몸을 더듬거렸다. 옷이 허실히 팔락였다. 피부에 찬 융기가 돋았다. 미채는 마른 눈을 한만스레 깜박였다. 한주가 손목을 낚아챘다. 미채를 끌고 바깥 문에 나섰다. 모친이 막아섰다. 어딜 가냐고. 한주는 잊고 온 게 있다고 말했다. 어쨌건 오늘은 늦댔다. 내일로 하라며 미뤄냈다. 미채가 입을 열었다. 미채는 오늘밖에 없댔다. 미채는 내일 떠날 거였다. 얘가 절 데려다줄 거예요. 한주를 기대 말했다. 한주는 틈을 타 빠져나갔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글쓰기 > 식일 연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향  (1) 2023.12.03
식일  (0) 2023.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