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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식일 연작

하향

이하루 - 2023.10.03.
 
 
  백지에게 개가 있었다. 미채는 뚝 멎어섰다. 개가 미채를 둘레 돌면서 낯선 살냄새를 살폈다. 코가 무릎께까지 닿았다. 백지가 손등을 저어가며 주둥이를 물러내려 했다. 개는 밀림 없이 미채에게 다가들었다. 손품이 자꾸만 머리 위로 타넘었다. 주인 요령이 없네. 미채가 이죽대자 백지가 안된 눈빛을 보냈다. 미채는 고개를 끄덕했다. 자신을 개가 익힐 때까지 가만 뒀다. 개는 곧 혀를 뺐다. 더운가봐. 백지가 손을 끼어들어 개의 코를 대봤다. 물기가 덜했다. 개가 입주변을 날름 핥아 훔쳤다. 두세 번 만에 자기 코까지 닿았다. 백지가 화채를 해먹자고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미채는 무릎을 쓸어 닦았다.
  미채가 거들겠다며 따라붙었다. 칼을 하나 더 꺼내와 달랬다. 둘이 탁자에 마주 앉았다. 있는 과일을 하나 씩 모아 올렸다. 주사위 만하게 조각내면 된댔다. 손질하는 대로 접시 한데에 모아넣었다. 탁상이 낮아 개가 위를 넘겨다봤다. 이따금 미채의 손날이 부딪쳤다. 가벼운 탁상은 결결이 울렸다. 백지가 못내 끼어들었다. 칼을 그렇게 잡아선 자기 손을 해치기 쉽다는 거였다. 백지가 본을 보였다. 검지는 날이 아니라 등에 대고. 재료 잡는 손은 오므려야 했다. 게다가 무른 재료를 치는 데에 괜할 만큼 힘이 들어가있었다. 미채는 시키는 대로 다잡았다. 손가락이 잘 감기지 않았다. 점차 손맥이 풀렸다. 몇 번만에 몸에 맞도록 원래처럼 되돌렸다. 얼마 안 있어 손끝을 썰렸다. 피를 보고 몸서리를 내다가 도마를 엎었다. 백지가 수건을 가져왔다. 다친 건 검지였다. 미채가 수건을 맞들어 상처에 갖다댔다. 맺힌 출혈이 걷혀나갔다. 잘린 면이 드러났다. 손끝이 굴곡을 잃어 우묵했다. 거길 들여다보면서 상처난 깊이를 가늠했다. 백지는 도마 엎은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흔적이 드물었다. 벌려놓았던 것치곤 반절쯤 사라졌다. 개가 탁상 밑으로 들어갔다. 이젠 입을 닫고 있었다.
  핏물은 밤이 돼선 멎었다. 붙여놓은 탈지면이 녹녹하게 들어찼다. 미채는 집에 가서 추궁받았다. 어쩌다 그렇게 됐느냐고. 뼈를 발라내다가. 망고의. 망고 뼈를. 어머니는 엉성한 처치를 새로 하려 검지의 헝겊을 벗겼다. 막은 걸 치우자마자 피가 도로 트여 나왔다. 응급실에 데려가 의사를 보게 했다. 흉이 남겠는지, 어머니가 물었다. 의사는 미채의 손바닥을 위를 향해 펼쳐놓고 숙시했다.
  떨어진 손끝은.
  잃어버렸어요.
  잊어먹었다고? 의사는 온전히 자라나지는 못할 것이라 답했다.
  미채가 할 일은 없었다. 면포를 둘러씌운 검지로는 운지가 되지 않았다. 밴드는 베이스가 빠진 채로 연습 하다가 평소보다 일찍 파했다. 학교에 두고 다니던 베이스를 하교 때에 가지고 나왔다. 어차피 이달부터 방학이었다. 내처 다른 부원들도 각자 악기를 거둬 갔다. 미채는 베이스를 매고 책가방은 손에 들었다. 백지가 따라붙어 왔다. 미채의 책가방을 뺏어 떠맡았다. 밴드부에서 백지는 가창이었다. 챙길 악기가 없었다. 오늘도 너희 집에 가고 싶다며 미채가 꼬셨다. 오늘은, 백지는 말을 둘러냈다. 백지의 가지런한 앞머리 아래에서 땀기가 움텄다. 오늘은 네 짐이 무거우니까 네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들은 그리로 발길을 정했다.
  알려줘. 백지가 베이스를 가리켰다. 미채는 도리 저으며 말렸다. 내 주법은 제대로 되잖은 손버릇이 배겼으니까, 그게 옮을 거라고. 당장은 연주가 풀린들 그것이 언젠간 발목을 잡을 거였다. 백지는 그리 길게 따지지 않았다. 방학 동안만이었다. 미채가 나을 때까지 빈자리만 메웠다가 말 셈이었다. 미채는 으쓱이며 베이스를 가져다 백지에게 안겼다. 그리고 왼손을 잡아끌어 베이스의 목에 붙였다. 손 네 가락을 짚어가며 줄을 누르게 했다. 손모양이 차려질 때까지 계속 시켰다. 맞는 모양이 돼서 그대로 굳혀보라 시켰다. 백지의 팔이 바들댔다. 백지는 어느 틈에 수굿해져 있었다. 그대로 줄을 튕겨야 했다. 백지가 엄지로 줄을 당기고 놓았다. 줄은 먹먹히 울었다. 똑바로 소리 나지 않았다. 덧긋는데 여전히 엇나갔다. 미채가 왼손 힘 빼지 말고 있으라며 다짐을 줬다. 그리고 단김에 줄을 눌렀다 뗐다. 줄이 무겁게 떨렸다. 백지는 짚고 있던 손끝이 쓰려와 눈살을 썼다. 소리는 분명했다. 아프지. 미채가 말했다. 그러나 그게 정석이라고.
 
  강아지였는데 금방 개가 됐다. 백지네 개를 큰집에다 내려보낼 거라고 했다. 개를 데리고 있기엔 아무렴 마당이 나있는 집이 편할 터였다. 백지 혼자 데려다 가서 그길로 방학 동안 며칠 지내고 올 계획이었다. 자기가 걸음해서 바래다놓겠다고 백지 스스로 고집했다. 이야기를 들은 미채가 개를 쓰담았다. 아픈 손을 썼다. 섭섭하네. 개는 손안에서 빠져나와 붕대 감긴 자리를 흠흠거렸다. 같이 가고 싶다고, 미채가 불쑥 청했다. 백지가 헛침을 삼키려는데 입속이 말랐다.
  역에서부턴 개를 이동장 안으로 들여야 할 것 같았다. 개는 입구 주변을 서성이면서 좀처럼 들어가지는 않았다. 처음이라 서먹해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에서 새것 냄새가 풍겼다. 미채가 맞은편 창살에 다가갔다. 그 틈새로 간식을 내밀었다. 개는 금세 머리를 돌려 세워 우리 안으로 깜박 들어섰다. 개가 간식을 낚아 무는 사이에 문을 닫았다. 개는 입에 든 걸 삼키고 나자 창살에 앞발을 긁으며 낮게 울었다. 떡이 거저로 생기겠니. 미채가 안으로 손을 통해 머리를 어루쓸어 달랬다.
  끌 수 있는 물건이었는데 백지는 그걸 들고 다녔다. 열차 시간이 가까워 바로 나가있기로 했다. 기다리는데 별안간에 개가 쩌렁히 헛짖었다. 잔향이 플랫폼 일대에 어룽댔다. 백지가 개와 눈을 맞추고 볼먹은 투로 책망했다. 대면하는 동안 표정에서 뾰로통한 기색이 점점 풀려나갔다. 더운 건가. 플랫폼엔 볕살이 찔려 들어왔다. 가방에서 물통을 꺼냈다. 창살 사이로 들락일 만한 두께는 아니었다. 슬몃 잠긴 걸 끄르고 문을 열었다. 그다음은 백지보다 개가 빨랐다. 문짝을 치받고 목을 밖으로 뻗었다. 삐져나온 앞발로 백지의 무릎을 디뎠다. 백지가 대놓은 물통으로 곧장 주둥이를 내밀었다. 가쁘게 물을 들이켜더니 얌전해졌다.
  내려야 할 때를 백지가 일깨워줬다. 벌써. 창밖이 느려졌고 자리에서 몸이 떠밀렸다. 백지가 먼저 일어나 윗짐칸에서 가방을 꺼냈다. 통로에 이동장을 든 채 서있기가 뭣했다. 미채가 준비하는 동안 백지가 먼저 하차구로 나갔다. 미채도 뒤따랐다. 내려서 역 표지를 확인했다. 역명이 달랐다. 아직 덜 간 데에서 내린 거였다. 백지는 바다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부터 걸어서도 닿을 거리에 연안이 있었다. 예전에 와봤던 장소였다. 백지는 그 자리에서 개를 풀었다. 미채가 잠자코 우리를 챙겨들었다.
  인적이 뜸했다. 백지는 여기가 서쪽이라 그렇다고 했고 미채는 시간을 잘 타서 그런 거라고 했다. 들고 온 것들을 모래밭에 내려두고 물가로 갔다. 개가 파도가 드나드는 영역을 기웃거렸다. 백지가 신은 걸 벗어던졌다. 그리고 파도가 들어올 때 발을 집어넣었다. 개는 백지에게 끌리면서도 물젖을 데까지는 밟지 않으려 버텼다. 목줄이 단단해졌다. 백지가 손목을 두어 번 더 찰칵여봤다. 개는 제자리에서 군걸음 치며 몸을 내둘렀다. 백지도 더 이상 꾀지 않았다. 미채가 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백지더러 목줄을 놔보라 시켰다. 목줄을 놓아주고 개는 반보쯤 떨어졌다. 미채가 백지의 팔을 붙잡았다. 백지를 끌어 바다로 내달렸다. 뒤에서 개가 우짖었다. 담박질의 기세에 따라 맞추느라 거길 돌아볼 새가 없었다. 허리까지 물든 깊이에서 그만 멈췄다. 뒤를 보면 개가 헤엄쳐 쫓아오고 있었다. 백지는 치기스레 더 나아갔다.
  미채가 맞았다. 햇살이 꺾이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미채가 이만 나가자고 했다. 얘 물 먹는다. 그러면서 개를 가리켰다. 개가 바닷물을 핥아 들이고 있었다. 백지가 개를 안아들어 물 밖으로 꺼냈다. 개는 가만 안기지 않았다. 입을 다시 물에 대려 버둥거렸다. 너는 짠물을 그렇게. 백지는 팔을 치올렸다. 삼키면 안 되는 줄 모르나, 본능처럼. 미채가 개의 배를 얕게 콕콕대며 주의를 흩뜨렸다. 삼키는 게 본능이잖아. 물 밖에 나오자 공기가 새삼 아슬해 소름이 났다. 물에 가있던 동안 백지의 전화에 연락이 쌓여있었다. 미채가 짐 가방을 비집어 갈아입을 걸 꺼냈다. 개가 꼴깍대기 시작했다. 그걸 백지가 가라앉힐 양 더듬었다. 개는 맥박처럼 울걱거리다가 모래 위에 묽게 토했다.
  물에 가있던 동안 백지의 전화에 연락이 쌓였다. 집에서 온 연락이었다. 백지가 그 자리에서 되걸었다. 수 시간만이었다. 집에선 금방 받았고 일시에 닦아세우기 시작했다. 백지는 그들이 열차를 어디에서 내렸으며 지금은 그곳의 바닷가에 왔다고 털어 말했다. 몇 마디 안 가서 오래 끌지 않고 끊었다. 백지의 귓가에서 떨어지는 수화기가 여전히 재갈거렸다. 그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물이 보이는 주변을 나돌았다. 백지는 겉옷을 꺼내 입었다. 넉넉한 맵시의 문살무늬 남방이었다. 밤공기에다 해풍이 들어 살랑했다. 미채의 말총머리가 바람 방향대로 나부꼈다. 백지가 미채의 추위를 걱정했다. 미채는 겉옷을 따로 챙기진 않았댔다. 채비가 많으면 많은 대로 곤란하다면서.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거기에 백지는 아직도 바닷가라고 전했다.
  지나던 보도 바로 옆에 차가 섰다. 소형차가 급하게 정차하느라 차체가 휘청였다. 거기서 내려 나오는 사람을 백지가 떠듬적 아는 기색을 냈다. 그 사람은 회색의 나른한 차림이었고 백지에게 언니라 불렸고 미채가 붙인 인사를 알아채지 못 했고 우선 백지의 뺨을 쳤다. 개가 신경질을 부렸다. 백지와 언니가 맞서는 동안 내리 짖었다. 백지는 개한테 눈길을 매어뒀다. 언니는 키가 컸고 매 동작이 넓었다. 짝다리를 바꾸고 이맛머리를 짚어 올리며 과호흡을 삭였다. 언니가 가자, 고 정리했다. 차에 타기 전에 미채는 다시 인사했다.
  큰집엔 이미 개집이 있었다. 일부러 마련한 건 아니었다. 쓰던 티가 있었다. 크기는 넉넉했다. 가져온 이동장을 언니가 받아 맡았다. 그건 창고로 들어갔다. 개에게 철삭으로 목줄을 이었다. 살던 집이 아니라 정이 붙을 때까지 매어둬야 했다. 개는 부득대며 애를 쓰더니 모두가 현관으로 들어가고 나서 가만해졌다. 백지와 미채에게 방 한 칸이 따로 내주어졌다. 이부자리가 깔렸다. 침대를 쓰지 않는 집이었다. 둘이 같은 방을 쓰도록 해도 되겠는지 언니가 물어줬다. 백지는 끄덕이는 기미였고 미채가 답했다. 미채가 훑기로 더 남는 방은 없었다. 언니는 모두들 주무시는 중이라고 시간을 일러뒀다. 쉿, 하라면서 자기 입술을 찔렀다. 바로 잘 준비를 했다. 백지가 가로누웠다. 미채를 보는 방향이었다. 시선이 꽂힌다고 미채가 간지럼을 탔다. 투정을 내기에 백지도 맞대꾸했다. 다른 쪽으로 돌아누우면 맞은 따귀가 닿는다며 사정을 댔다. 천장 보고 곧은 자세로는 못 자냐니까 그렇댔다. 그들은 머리맡 위아래를 바꿨다.
 
  백지는 샐녘에 일찍 깼다. 아침엔 붓기가 다 들어가고 없었다. 욕실에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백지는 꼭 같은 자리를 제 손으로 때려봤다. 백지는 자신의 살이 부딪은 좁은 메아리 안에서 어느 음악을 기억해냈다. 물결 혹은 총성. 불현듯 외국어로 그 단어들을 떠올렸다. 방으로 돌아가니까 미채가 눈을 뜰락 말락 했다. 어렴풋한 군소리를 흘리며 눈가를 비비작거렸다. 백지는 옆에 가서 누웠다. 목청을 사리면서 하는 말이 닿도록. 연주를, 계속 알려줄 거지 하는 말이었다. 미채는 으응, 하고 찌뿌듯하게 우물댔다.
  잠자리를 삐대다가 창밖에서 큰소리를 들었다. 닭 잡는 소리였다. 어스름하던 날이 쨍해지기 시작했다. 백지는 완전히 깼다.
  복날이라며 아침에 닭국이 나왔다. 집안의 식탁을 놔두고 솥이 가까운 마당에 상을 폈다. 마당 한구석에서 개가 보챘다. 백지와 미채는 전날 밤에 얼굴 대지 못했던 노인들에게 이제야 인사를 차렸다. 노인들은 두 사람을 익숙히 반겼고 그릇을 가득가득 채워줬다. 노부인이 백지의 안색을 물었다. 뺨에 오른 붉은 기운에 대해. 백지의 입 안에 뜨거운 것이 들어있었다. 입가를 막으며 버거운 기색을 피웠다. 언니가 말하려는데 미채가 끼어들어 앞질렀다. 자신이 휘청인 기타에 맞아버려서 멍이 잡혔었다고. 언니가 미채를 둥그레지게 쳐다봤다. 기타 치는구나. 그렇게 흘려보내고 다시 수저를 움직였다. 백지는 절절대던 입 안을 목 넘김 하고서 미채에 관해 소개를 늘어놓았다. 같은 밴드 동아리를 하고, 거기서 베이스를 치고. 미채에게 이목이 가자 노부인이 다시 캐어물었다. 붕대 댄 손은 어떻게 된 거냐고.
  칠떡대던 쇳소리가 끊어졌다. 금방 빠져나온 개가 미채를 향해 달려왔다. 반좌를 타고 올라 미채의 수저질에 집힌 고기를 답삭 채 먹었다. 뒤로 젖혀진 미채는 바닥을 짚어 몸가눔했다. 맥 빠진 눈힘으로 개를 응망했다. 반상 맞은편에 있던 언니가 일어섰다. 개를 밀쳐 미채의 위에서 걷어냈다. 개는 땅바닥으로 물러났다. 백지가 개를 양팔로 품어 붙들었다. 목줄이 빠져있었다. 미채는 허리를 펴 앉은 자세를 바로 했다. 자기 팔을 들어 봤다. 손을 급히 다루다가 상처가 들쑤신 모양이었다. 붕대에 점점이 핏자국이 올랐다.
  마을회관에 기타가 있다. 오전 동안 집에서 한적했던 미채에게 노부인이 귀탬해줬다. 미채는 나중 언젠가 들려보겠다고 미뤘다. 곁들은 백지가 오늘 나서자 재촉했다. 노부인이 여세로 거들었다. 개도 갑갑한가 보다 하고 겸사 산책시키고 오라며. 미채가 먼저 나섰다. 백지는 뒤좇아 나가다가 문지방에서 비끗댔다. 낮은 데를 잘못 밟았다. 여름밭이 진초록이라 그쪽으로 걷기로 했다. 개는 주둥이로 생풀을 훑느라 길섶으로 붙었다. 미안하다는 백지에게 미채는 왜냐 반문했다. 네가 그러기라도 했냐고. 손목 세운 팔을 나직이 들쳤다. 백지는 뭐라 대꾸하려다가 미채의 돋운 눈짓에 마주쳐 살웃음만 비실대고 말았다.
  맞은 편에서 오던 사람이 백지를 알아봤다. 저편에서부터 이름을 부르며 보폭을 다그쳐 왔다. 아장거리는 아이와 손 잡고 있었다. 모친인 모양이었다. 백지는 멈춰 섰다. 누구야. 미채가 물었다. 누구지. 백지가 속닥였다. 상대 쪽에서 올 때까지 제자리에 가만 기다렸다. 백지, 못 본 사이 많이 컸다. 그는 그렇게 첫 인사를 꺼냈다. 아이의 팔을 잡아서 흔드는 시늉도 내보였다. 백지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치레 했다. 그걸론 객쩍어 방학이라 잠시 내려와 지내다 간다고 부연했다. 모친은 반색해서 예전 일을 꺼내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표현하기로 백지가 딱 옆의 아이 만할 때의 일들이었다. 아무래도 그것들이 백지의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을 테라고, 그는 자답하면서 말을 멎었다. 그가 제풀에 주억거리길래 백지도 마주 끄덕였다. 백지는 그의 아이에게 내내 한눈이 팔렸다. 아이는 일없이 개를 만지고 있었다. 말을 알아서 개한테도 안녕이라 그랬다. 모친은 아예 돌아가기 전에 또 보자며 다짐 맺고 갈라섰다. 백지는 주먹을 오므렸다. 이제껏 떨고 있었던 것 같았다.
  회관은 열려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입구 주변 기둥에 개를 매어뒀다. 기타는 거실 낮은 서랍장 위에 걸터 있었다. 갈빛의 통기타였다. 미채는 자신이 아는 건 베이스고, 기타는 다른 거며 모른다고 그어 말했다. 백지도 알았다. 지금은 잡는 법만 연습하려는 셈이니까, 허우대만 비슷이 맞으면 됐다. 미채가 기타를 가눠 잡았다. 음계를 한 차례 훑어 냈다. 음정에 기운이 모자랐다. 관리는 된 것 같은데. 백지가 감평하며 거기에 괜히 손을 태워봤다. 무른 색의 보송한 몸체였다. 미채는 기타 머리를 죄었다 풀며 줄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아낀다고 아껴지니. 미채의 다듬질 안에서도 조음은 여전히 엇나갔다. 멍멍하게 듣다가 백지는 반힐했다. 무엇이? 미채는 희미한 걸 가늠하려 눈자위를 좁혔다. 글쎄다며 대답을 쟀다. 세월? 미채가 이건 틀렸다며 그만 기타를 내려놨다. 나사는 이미 끝까지 감겼다. 이때까지도 소리가 맞질 않았다.
 
  아이와 모친은 조만에 집을 찾아왔다. 백지와 언니가 현관에 나가 마중했다. 아이는 그걸 지나쳐 마당으로 앞서 들어섰다. 그리고 개집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 자리에서 개에게 몸놀려 가며 들떴다. 엎드렸던 개가 쉽게 깨어났다. 모친은 어깨너머로 아이에게 두어 마디 경고했다. 그리고 언니에게 해명했다. 예전 개를 그리워 해서 저런다고. 아이는 마당에서 놀게 뒀다. 괜찮겠죠. 모친이 가늘게 말했다. 백지는 되잡아물으려 했다. 언니가 먼저 긍정하길래 백지는 모른 채 덩달아 끄덕였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는 점심 준비하던 걸 마저 했다. 모친은 집의 노인들과 일찍부터 식탁에 앉아서 환담했다. 백지 이야기가 말거리가 됐다. 백지는 귀가 섰다. 거기서 부르는 말이 있으면 대답만 했다. 대화는 얼마 안 가 다른 화제로 흩어졌다. 백지는 상관없어졌다. 점심을 기다리는 사이 비가 내렸다. 기미도 없이 비가 오길래 소나기라고 믿었다. 백지는 마당으로 나갔다.
  백지는 비 맞는 아이를 불러들였다. 아이는 몸에 묻은 빗물을 떨치면서 백지의 주변을 수선히 뛰어다녔다. 아이의 몸짓에 개가 충동 받아 짖었다. 마당에 생긴 질은 흙탕이 개집의 바닥을 잘박이고 있었다. 백지는 개를 데리고 툇마루로 들어갔다. 아이도 백지를 따라 와 옆에 앉았다. 처마가 짧아 다리오금을 바짝 붙였다. 엎드려 앉은 개에게 아이는 얼굴을 들이댔다. 개가 입가를 달싹이며 가르랑댔다. 희고 붉은 입안이 어뜩 드러났다. 개의 몸이 그 소릿결대로 떨렸다. 개를 앉혀둔 무릎이 백지는 둔하고 무거워진 것 같았다. 아이는 개의 동요를 재밌어 했다. 백지가 개의 목을 감아 머리를 이쪽으로 당겨왔다. 눈맞춤을 너무해서 긴장했나 보다고, 아이에게 에둘렀다. 아이는 백지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왜냐고 물었다. 왜 긴장하느냐고. 백지는 거짓말만 생각나서 대답하지 못 했다. 아이는 백지를 또라지게 기다리다가 이내 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미채가 툇마루에 나왔다. 밥 먹게 들어오라고 알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백지가 울상스레 돌아봤다. 낌새챈 미채가 살피러 왔다. 개는 귀거친 숨을 잇사이로 흘리고 있었다. 미채가 아이 옆에 어깨 나란히 다가들었다. 아이에게 나란히 개를 바라보며 조심을 줬다. 이 개는 문단다. 개가 단박에 짖었다. 백지와 아이가 따끔히 밀려났다. 아이는 울면서 들어갔다. 모친이 듣고 찾으러 나왔다. 동석하던 사람들도 따라 몰려나왔다. 아이가 모친에게 일렀다. 개가 물 거래. 개는 백지의 다리에 올라탄 채 한창 짖어댔다. 언니가 개를 채어 들었다. 백지의 바지 끝단이 축축히 물들어 있었다. 개는 마당에 도로 묶였다.
 
  창고는 잠겨있었다. 백지가 잠긴 문을 매련히 덮두들겼다. 철쇄가 들썩이며 마당에 기척을 울렸다. 미채가 말렸다. 노인들이 깰지도 몰랐다. 백지는 마음을 끊고 개를 데리고 돌아섰다. 미채가 재차 붙들었다. 그대로 가선 어차피 기차에 태울 수도 없으리란 거였다. 백지는 다른 우리를 사가지고 가겠다 했다. 이 밤에 시골 어디서 구하겠느냐 따져묻자 뱃심이 궁해졌다. 백지가 시쁘게 변명했다. 보는 눈 없이 틈타 떠날 기회가 또 언제 있을지 모른다고. 미채는 백지가 잡은 목줄을 제 손에 가져왔다. 백지는 원만히 빼앗겼다. 미채가 목줄을 개집에 돌려 걸어놓았다. 하루 기다려서 오는 아침에 떠나자고 했다. 다들 보는 데에서.
  준비할 게 있어 읍내까지 다녀왔다. 편의점에서 소금 일 키로그램을 샀다. 포대기 하나였다. 작은 통에 소분된 분량만으론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한 시간 조금 안 되게 걸었던 길을 되돌아갔다. 내려 잡은 포대에 백지의 허벅살이 툭툭댔다. 동네가 가까워질수록 보도가 박해졌다. 옆의 일차선 도로로 이따금 차가 지나쳤다. 옆을 아끼면서 걷느라 노방의 수풀에 종종 긁혔다. 팔의 상피가 부허옇게 일어났다. 승용차 한 대가 그들을 조금 막지른 데에서 멈춰섰다. 운전석에서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였다. 늦게 나다니는 걸 꾸지람하곤 뒷자리에 태워줬다.
  언니가 웬 소금인지 물었다. 비포장길이라 차가 털겅거렸다. 백지는 미채를 바라봤다. 미채는 내리뜬 눈으로 바닥을 보고 있었다. 미채도 이쪽을 일별하길래 기대를 거뒀다. 제 무릎에 올려놓은 소금 포대를 쳐다봤다. 언니가 후사경으로 뒤에 시선을 보냈다. 백지가 꿀컥 대답했다. 죽일려고. 차가 방지 턱을 주의 없이 넘었다. 뒤늦게 브레이크를 넣어 차가 그 자리에 섰다. 뭘? 언니는 덧물었다. 백지는 소금이 죽이는 것을 떠올리려 했다. 울렁거려서 궁리가 흐트러졌다. 달팽이, 라고 미채가 가로맡았다. 낮에 비가 내렸던 뒤로 그것들이 기어나오기 시작했다고. 마을 길목에 놓인 교량을 지나면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언니가 자러 들어가면서 마루 전등은 다 꺼놓았다. 백지와 미채는 깬 채로 자정을 기다렸다. 잔에 식수를 받아왔다. 백지가 새 소금을 뜯었다. 바닷물만큼이면 되겠지. 미채가 동의했다. 염도를 헤아리며 식수에 소금을 탔다. 소도록한 소금이 풀리며 물에 부윰한 기가 돌았다. 물의 소금기를 백지가 맛봤다. 물결이 자란자란해서 짧게 호록댔다. 삼키려다가 기침이 터졌다. 자꾸만 몸이 튕겨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기침 바람을 틀어막았다. 매캐한 느낌에 코끝이 찡하게 달았다. 너무 했냐고 미채가 물었다. 백지가 끄덕였다. 너무 독하다. 희석할 맹물을 더 큰 잔에 받아왔다. 짠물을 거기다 부어 옮겼다. 짠물이 잔의 표면을 타고 밖으로 새어나갔다. 미채는 기울인 잔을 거두고 바깥을 흐르는 물을 닦아 올렸다. 상처에 댄 붕대로 소금물이 배어들어갔다. 곧 아파질 거라 생각했고 금방 예사스레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미채는 붕대를 벗겼다. 한참만에 나온 맨살이 사늘쩍했다. 상처는 밑꼴과 상관없이 닫혀 아물어가고 있었다. 미채는 손을 씻었다.
  백지가 자기 혼자 가서 주고 오겠다 했다. 그게 좋을까. 백지는 그렇다고 응했다. 안심찮아도 그렇게 해야 맞는 일이라 생각했다. 소금물을 들고 마당에 나갔다. 쉬던 개가 일어나서 꼬리질 했다. 백지는 개집 앞에 놓인 물그릇을 집어들었다. 거기 담긴 물을 내휘둘러 땅에 엎었다. 비워낸 그릇에 소금물을 따랐다. 개는 그 물을 몇 번 할짝대더니 허파 긁는 듯한 소리를 내고서 입을 뗐다. 백지는 방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개가 때맞게 구역질을 했다. 미채가 노부인을 불러와 개를 보였다.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내대어 말했다. 노부인은 그러라고 했다. 개가 혼자 몸 가누길 힘겨워해서 이동장을 다시 꺼내야 했다. 백지는 미채가 구하는 모습을 아슴아슴 조리치며 지켜봤다. 죽 자지 못 해 나른했다. 개는 한동안 입 안의 것을 자꾸만 흘려냈고 그들은 그게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가는 길 마을 어귀에 강이 있었다. 물가로 내려가 우리에 싣어온 개를 풀어줬다. 민물을 먹여야 할 것 같았다. 미채가 바다로 돌아갈까 물었다. 백지는 뿌리쳤다. 큰집에 짐을 다 두고 왔다. 갈아입을 옷도 전화의 충전기도 없었다. 개는 물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백지가 강으로 들어갔다. 물 안에서 손뼉을 쳐가며 북돋았다. 그러면 이만 집으로 가겠느냐고, 미채가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제 박수 소리를 뚫으려 백지가 힘주어 외쳤다. 개는 자리에서 더 다가오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할래. 미채도 백지만큼 소리를 키워 말했다. 미채가 개의 옆에 오그려 앉았다. 오목히 굽힌 손으로 물을 펐다. 개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개는 거기에 순히 입을 댔다. 백지는 미채가 건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할지. 개가 전부 해갈하고 물러날 때까지 그렇게. 백지가 밖으로 나왔다. 굽혀 앉아있던 미채를 내려 쳤다. 미채가 물로 넘어졌다. 미채는 얕은 물에서 단숨만에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맞은 자리를 눌러봤다. 붓기가 굳어있었다. 미채가 힘을 놓듯 헛숨을 뱉었다. 그렇지. 미채가 그렇게 말하는 걸 백지는 들은 것 같았다. 백지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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