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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일 이하루 - 2023.08.13.    여기에 상처가 있다. 미채가 등 한 군데를 짚어주었다. 맥 풀고 있던 영윤은 등이 떠밀렸다. 웃몸이 굽는 김에 목도 따라 숙여졌다. 미채의 손끝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다친 데에 일어날 법한 통증 같은 건 없었다. 곰곰 등에 신경써보다가 어깨 한편이 비끗댔다. 다칠 만한 일 없었어. 영윤은 고붓했던 자세를 세우며 미채의 팔을 물리쳤다. 뭐라든 아픔이 없었다. 미채는 내밀린 팔을 소리가 나도록 자리에 폭 떨궜다. 감이 없구나. 미채가 등판을 반히 들여다보는 동안 그는 다시 완완하게 수그러졌다. 미채에게 마주하려 고개를 틀었다. 배면을 댄 몸자세로는 거기까지 닿진 않았다. 뒤뜬 시선이 어중간에 머물렀다. 방에선 눈을 매어둘 만한 흠이 보이지 않았다. 미채가 약을 구해오겠..
예보 이하루 - 2022.08.11. 범은 별안간 속력을 높여 차를 다그쳐 몰았다. 하늘빛이 먹먹해졌고 비가 내리리란 예보가 있었다. 이왕이면 정장에 물먹이지 않을 셈이었다. 게다가 우산이며 젖은 밑창 따위가 통메우는 실내를 범은 질색했다. 식장까지는 삼십 분 남짓한 거리였다. 범의 가속에 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무릎에 올린 손아귀에도 힘이 실렸다. 범은 룸미러로 안의 눈언저리를 흘겼다. 그건 무언가를 참고 다스리려는 몸짓처럼 보였다. 얼마 안 가 안이 눈주름을 풀었다. 범이 그녀를 거울로 비춰 보고 있었다. 그녀는 반동으로 뒤로 쏠린 몸을 내처 시트에 쭉 붙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범의 얼굴을 바로 향해 보았다. 걔는. 안은 말문을 떼려다가 우선 목부터 축였다. 컵홀더에 손을 뻗으려면 좌석에 파묻힌 몸을..
매장 이하루 - 2022.03.22. 유미는 땅에 묻기를 원했다. 달리 장례할 방법은 알지 못 했을 거였다. 부모는 도울 생각이 없댔다. 우리는 죽은 생쥐를 추슬러 산으로 갔다. 도회에서 너그럽고 무른 땅이라곤 거기밖엔 없었다. 유미는 금세 숨이 찼고 찬기를 들여쉰 코끝이 매작지근히 발개졌다. 그는 걸으면서 계속 흔들렸다. 걸음이 얕아 자꾸만 발부리가 걸리는 탓이었다. 겨울옷이 끼어 몸이 잠긴 모양이었다. 산의 질커덕한 땅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유미는 얼김에 멎어서며 손에 움킨 생쥐를 들여다봤다. 그건 유미의 양 손뼉에 뻣뻣히 들어맞아서 흘러 떨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죽은 건 삼일 전이었다. 그 사흘 동안 유미는 생애 처음 맞는 사체를 두고 방도를 잡지 못 하고 있었다. 쥐는 제자리에서 가만가만..
3장. 인스턴트 유성 발생 장치 양서토 - 2021.10.25. 유성은 별꼬리가 살아있는 한, 인간이 그 귀에 대고 한 말이 있다면 반드시 그대로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르소는 별의 당위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 유성 예보가 있는 날마다 변두의 들판으로 나가 별밤에 대고 주문을 올렸다. 하지만 뭇 신앙이 그렇듯 즉각의 보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언 일곱해 째였다. 리아모가 하르소의 입에서 직접 그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그녀는 외력을 동반하지 않은 뇌진탕을 경험했다. 하르소는 자신의 가감 없는 고백이 자못 홀가분한지 선연히 웃었다. 그가 선뜻 부탁할 게 있다며 고개를 숙이자 리아모는 당혹스러워 했다. 아무런 신기도 없는 속인의 몸으로 사제의 독실한 제례를 받아버린 기분이었다. 그는 별에 소원을 청할 방법을 어떻게 고치면 좋을..
의외로이 들이낀 하드록 트랙 양서토 - 2021.08.30. 제목이 왜 이래. A가 말했다. 이런 걸 소설적인 제목이라고 해. B는 칠판의 글자를 지시봉으로 두들겼다. 소설적인 게 뭔데. C가 토를 달았다. 사건성이지. 하드록 트랙이 들이낀 건 사건성이 있는 거야. 다시 A가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드록 트랙은 어딨는데. 지금 천장 스피커로 나오고 있어. 난 여기 천장이 있는 줄도 몰랐어. 우린 이걸 왜 하고 있는데. 튀는 글을 쓰면 반응이고 인기고 좋잖아. 재기발랄하다는 트렌드야. 그래? 그렇구나. C가 말을 마치자 B는 칠판을 냅다 쓰러뜨렸다. 갑자기 왜 그래. 이래야 고조될 것 같아서. 아니야, 그건 아니야. 다짜고짜 물건을 팽개치는 건 사건이 아니라 사고일 뿐이야. 핍진성에도 안 맞아. 사건이랑 사고는 뭐가 다른..
선인장 이하루 - 2021.08.18. 선인장이 죽었다. 적어도 그래 보였다. 색과 부피를 잃어버린 것들은 대개 그랬다. 연은 분재를 내려놓았다. 방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화는 조금 놀랐다. 연이 뜻밖에도 담담했다. 창틀로 바람 소리가 새들어왔다. 화는 마른 기침을 했다. 선인장은 하루 아침에 죽어버린 게 아니었다. 건조는 몇주를 거쳐 계속 되었다. 죽음의 기점을 그 진행 속에서 언제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다만 연은 선인장의 변색과 수축을 보며 각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났을 때 화에게 그것이 죽었다고 말했다. 익사가 아니면 외려 죽기도 어렵댔는데, 결국은 말라 죽었다고. 화는 연을 존조리 타일렀다. 꽃 터지는 것도 봤으니 나름 천수를 다한 거랬다. 쁘띠 다육이 그만큼 사는 거 쉽..
회로 이하루 - 2021.06.25. 무연이 언제까지 걸을 테냐고 말했다. 나는 그때 퍼진 훈김을 맞았다. 우리는 고층 타워의 전망대를 나란하게 내리 돌고 있었다. 이곳은 앉을 자리가 없었고 외각의 지상 망원경은 렌즈가 닫혔다. 밤인데도 안개가 끼어 여기로 오는 사람은 달리 없었다. 간혹 올라온 사람은 얼마 안 있어 도로 내려갔다. 전망은 어렴풋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주에 붉은 달이 뜨리라는 예보가 있어 전망대엔 그때에 올 셈이었는데, 그 약속은 결국 파했다. 무연이 그 날 다른 일정을 예정했고 도저히 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댔다. 무연은 실수라며 사과했다. 그리곤 대신으로 오늘 달을 보러 가자며 마물렀다. 그녀는 뭐든 자주 잊어버렸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마주 섰다. 무연이 이쪽을 또렷또렷 쳐다보며 낮..
2장. 부기명 마도서 분실사건 양서토 - 2021.03.07. 오전 강의가 있는 날이 아니라면 으레 느즈막이 일어나는 샤덴이 구내식당에서 조식을 들고 있었다. 관내엔 소슬하고 푸르스름한 볕이 들었다. 아직 새벽녘이었고 그 외에 사람은 없었다. 그는 요 며칠 간 계속 이 시간에 식사했다. 곧잘 인파가 쏠리는 시간에 왔다간 전공교수와 마주칠지도 몰랐다. 일전에 있었던 언어 윤리관 논쟁에서 샤덴이 판정승을 거둔 이후로 교수는 보다 열성적으로 샤덴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혹여 교수가 합석이라도 하게 됐다간, 그는 임의의 변별을 거쳐 학생에게 즉각적이고 즉흥적으로 구두할 수 있는 교육자로서 응당의 비공식 권한을 아마도 식사 시간 내내 행할 것이었고, 샤덴은 스스로를 그런 처지로 내몰고 싶지 않았다. 또, 그는 학회에서 멸시받았던 일을 계기로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