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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언어역학의 이론과 응용

2장. 부기명 마도서 분실사건

양서토 - 2021.03.07.

 

 

오전 강의가 있는 날이 아니라면 으레 느즈막이 일어나는 샤덴이 구내식당에서 조식을 들고 있었다. 관내엔 소슬하고 푸르스름한 볕이 들었다. 아직 새벽녘이었고 그 외에 사람은 없었다. 그는 요 며칠 간 계속 이 시간에 식사했다. 곧잘 인파가 쏠리는 시간에 왔다간 전공교수와 마주칠지도 몰랐다. 일전에 있었던 언어 윤리관 논쟁에서 샤덴이 판정승을 거둔 이후로 교수는 보다 열성적으로 샤덴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혹여 교수가 합석이라도 하게 됐다간, 그는 임의의 변별을 거쳐 학생에게 즉각적이고 즉흥적으로 구두할 수 있는 교육자로서 응당의 비공식 권한을 아마도 식사 시간 내내 행할 것이었고, 샤덴은 스스로를 그런 처지로 내몰고 싶지 않았다. , 그는 학회에서 멸시받았던 일을 계기로 면학의 열기를 재점화하는 참이었으므로 아침 일찍부터 공부를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텅 비어 한적한 교내에선 어디에 자리를 잡든 집중하기 좋았다. 최근엔 마력 및 마술의 개념을 깨칠 기미가 보여오는 듯했다.

 

샤덴은 걸어나가던 도중 퇴식구 앞에서 묘한 게시를 발견했다.

 

 

오이김밥 멘탈브레이크 항의 본부에서 공고 붙임.

 

구내식당에서 오이김밥이라는 단어를 목격했다. 목격하고야 말았다. 여러분도 알아야 한다. 이 단어엔 어떤 주술적인, 그리고 악마적인 장치가 되어있는 탓에 그 기의에 대한 해석의 이중적 병존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청자로 하여금 단 하나의 상(像, image)을 강제하는 것이다. 외지의 언어철학자 솔 크립키는 이렇게 말했다. 나와 여러분이 오이김밥을 '오이도 들어있을 뿐인 평범한 김밥'으로 파악하는, 그런 상냥한 가능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배가 갈라진 채 실린더 속에 포르말린 처리된 개구리의 내용물처럼 명백한 어휘 성분에 의해 건강한 신경은 그것을 곧바로 시각 신호로 재현해낼 수 있다. (그 작업을 수행한 신경계는 더 이상 건강하지 않게 된다.)

 

안에서부터 오이-쌀밥-김으로 이어지는 노골적인 삼층 구성, 그것은 음식의 일면이라기보다 차라리 농구공의 단면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시각 특유의 풍성한 정보량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한 자극이 다른 감각으로 쉬이 전이되도록 한다. 이를 테면 우리는 오이김밥을 한 번 베어물고 난 뒤에 치아에 최종적으론 불쾌한 절삭감이 감돌 것이고 그 이상 턱을 사용한다면 -검열됨-을 느끼게 될 것임을 예감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오이김밥 같은 낱말을 내뱉는 사람이 품고 있을 커다란 악의 때문이라고 여긴다. 이 불가해할 정도의 악의를 마주했을 때 인간은 우주적 공포, 코즈미시즘, 즉 목성 따위의 크기를 가늠하는 경우와 같은 아득한 한기를 경험한다. 어쩌면 오이김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식음을 전폐하고 삶의 모든 열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단순히 미각적 불쾌함을 체험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그만큼의 불의와 반인륜이 실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에 뒤따르는 괴리감에 의한 절망의 증상일지도 모른다.

 

 

그는 조식을 오롯이 구토했다. 수강 도중에도 이따금 메스꺼움을 호소했고, 몇몇 강의에 대해서는 결강 사유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방과후엔 호전되어 무리없이 학회에 출석했다.

 

*

 

샤덴이 들어섰을 때 학회실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다들 머리를 싸매거나 긁거나 했다. 리아모는 의자에 늘어져 양미간을 주물렀고, 한 학번 선배인 피에가 사근사근 타이르고 있었다. 샤덴이 뭐라 묻기도 전에 피에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왔다.

 

마도서를 잃어버렸어.”

 

샤덴은 마도서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는 알지 못 했다. 다만 일동이 그것이 분실되었다는 사실에 낙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튼 그것이 고가를 호가하는 물건이라는 것 정도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사회적 의례에 따라 파심과 우려감을 담아 경악을 표했다. 그러나 적절한 피드백을 위해서는 그저 마도서가 비싸다는 사실 외에도, 대관절 얼마나 비싼 것인지 수치적인 데이터가 추가로 필요했다. 그래야 심심한 위로를 건네고 마무리 지을 것인지 혹은 선배의 재정적 파탄에 애도를 표해야 할 것인지, 어쩌면 구제를 위한 모금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리아모는 곧 그가 알맞은 연민 절차를 이행하는 데에 실패하리라는 눈치챘고 이에 그를 돕기로 했다.

 

마도서는 마력자의 배열을 디지털 데이터화 시켜서 명제식이나 방정식의 형태로 보존하는 입력 및 기억 장치 겸, 데이터에 따라 마력자를 조율하는 출력 장치의 역할도 하는 공구야. 연산 기능과 제어 기능은 운용하는 인간이 담당하고. 일종의 임베디드 전산기지.” 리아모는 잠시 샤덴이 잘 이해하고 있는지 동정을 살폈다. 샤덴은 엄지로 턱을 받치고 잠자코 들으며 선선히 끄덕였다. “성간 전차 계획의 진척이 전부 피에 선배의 마도서에 저장되어 있었고, 게다가 그 마도서가 없으면 앞으로의 작업에도 지장이 생겨. 지금 그걸 잃어버린 상황이야.”

 

백업은 해두지 않았고?”

 

못 했어. 물리학회에서 마도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었거든.”

 

샤덴의 얼굴은 경직됐는데도 눈과 입이 쩍 벌어진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눈길은 분실의 당사자인 피에에게로 옮겨갔다.

 

언제 어디서 잃어버리셨나요?”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는걸. 어젯밤에 사용하고 나서 여기에 놓고 나간 것 같은데. 방과후에 와보니까 사라진 참이야.”

 

앞뒤 형편을 이해한 그는 빈 의자를 찾아갔다. 다른 이들처럼 자리에 늘어져서 눈두덩을 어루만지며 높아진 안압을 진정시켜야 했다. 울음을 참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최대의 연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피에는 열없이 실웃음을 지으며 사과를 전했다.

 

사과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선배께서 잘못하셔서 도둑 맞은 건 아니잖아요.”

 

도둑 맞았다고?”

 

샤덴의 워딩은 의자에 눌러붙은 학회원들을 이쪽으로 뜯어 당겨오기 충분할 정도로 뒤가 끈적한 것이었다. 그로서는 물리학회에서 다시 없을 정도의 발언력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그는 새퉁스럽다는 듯 답변했다.

 

피에 선배가 어제 마도서를 여기에 놓고 갔다는 건 확실해. 내가 오늘 아침에 목격했거든. 오전 여섯 시 즈음에.”

 

그 시간에 학교엔 왜 온 거야.”

 

학교에 온 건 다섯 시야. 아침에 시간 내서 공부했거든.” 청자들의 호응이 미심쩍었다. 리아모는 ?”하고 보다 근본적이고 환원론적인 시각에서 덧물었다. “이게 주장을 이야기하기도 전부터 공격 받을 만큼 터무니없는 전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으면 돼.” 리아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습했다. “계속 말해봐. 삐치지 말고.”

 

그러니까. 아침까지는 여기 있었던 마도서가 오후에 사라진 셈이지. 그 사이에 피에 선배는 마도서를 소지한 사실이 없으니까, 마도서는 선배의 부주의로 점유이탈 되었다고 말할 수 없어. 또 마도서가 제 발로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리도 없지. 그렇다면 누군가가 마도서를 탈취해갔다는 설명밖에는 남지 않아. 따라서 이건 분실이 아니라 도난이야.”

 

다들 당초 느꼈던 전제의 부조리감을 깜빡 잊은 듯했다. 샤덴의 말을 수용하려는 흐름이었다. 리아모는 그의 해설이 무모순함을 인정했다. 사태가 도난 사고로 판별남에 따라 그들은 경찰에 신고하는 쪽으로 입을 모았고 이에 모두가 동의했다.

 

마도서를 되찾거나 그러지 못할 경우의 대책이 마련되기 전까지 계획은 동결되어야 했다. 리아모는 당분간 물리학회도 소집되지 않을 것임을 알렸다. 여기엔 모두가 동의하진 않았다. 동의하지 않은 건 샤덴이었다.

 

안 돼. 학회를 쉬었다간 내 학점이 떨어질 거야.” 그리고 이 이상 학점이 떨어졌다간 그는 학사경고로 제적될 것이었다. 리아모도 물러서지 않았다. “물리학회는 네 학점 수혈 목적으로 운영되는 게 아니거든.” 샤덴은 오전 때의 울렁증이 다시금 묘지 밖으로 어두운 손을 뻗치며 되살아나오는 것을 느꼈다. 마도서를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도 더 당혹스러워 했다. 그는 진실을 관철한 것을 후회해야 했다. 경솔했다. 진상을 떠벌리지 않았으면 일이 이렇게 흘러가지는 않았을 거였다. 공황에서 깨어난 그는 피에를 쳐다봤다. 피에는 무심코 뒷달음했다. 그녀는 급한대로 학점을 마련할 수 있는 다른 방도들을 이야기하며 샤덴을 어르려 했으나, 샤덴 쪽에서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신고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주변에선 반발이 일었고 피에도 대답이 곤란했다.

 

대신에 제가 범인을 잡고 마도서도 되찾아오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학회가 오래 중단될수록 손해를 보는 건 비단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같습니다. 경찰한테 맡겼다간 일이 해결되는 데에 얼마나 오래 걸릴 거라 생각합니까? 저라면 이틀 안에 끝낼 수 있습니다. 혹여 제가 실패한다고 해도 여러분이 잃게 되는 비용은 이틀 밤뿐이고, 기대되는 메리트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리스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 제안의 내용은 공익을 수호하는 것이고, 따라서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제안은 받아들여져야 마땅합니다.”

 

피에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리아모는 잽싸게 반론을 제기했다. 설사 그의 주장이 온당하더라도 그는 경찰의 조사와 별개로 범인을 찾아나가면 되니 신고는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순 없어, 리아모. 사설탐정은 위법이거든. 사적제재의 일종이니까. 경찰에게 알린 채로는 샤덴이 나서기 곤란한 거야.” 피에가 변호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일개 학부생에게 수사를 의뢰함으로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 시민으로서 적절치 못한 배임 행위를 범했다. 그녀는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구워삶기가 원만히 진행되어 한시름 놓은 샤덴도 같은 부류의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리아모는 일을 그르쳤음을 예감하고는 다시금 의자를 찾아갔다.

 

*

 

물리학회 전원에 대해 사건 당일, 즉 오늘 기상부터 현시점까지의 알리바이를 수집하겠어. 구술, 아님 필술이 좋을까?” 샤덴은 수첩을 꺼내들었다.

 

? 어째서 물리학회원들이 용의자가 된 거야.” 리아모는 샤덴의 전언에 반발해 사회적 척력을 행사했다. “사건 현장의 근무자들을 가장 첫째로 조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절차니까.” 샤덴은 안경을 중지로 올려 쓰거나 트위드 모자를 고쳐 쓰는 등의 제스처를 하고 싶어졌다. “모두들 경찰에 신고하기를 전혀 거리끼지 않았잖아. 이중에 범인이 있진 않을걸.” “네 추론은 그럴 듯하지만, 개연성이 확실성으로 이어지지는 않아.” “내 말은 사건을 파헤치기 더 적당한 출발점이 있을 거라는 얘기야. 엄한 곳에 집착해봤자 시간만 빼앗길걸. 실제로 물리학회에 범인이 있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나 될 거라 생각해? 너는 속도전을 내세웠잖아. 조금 불확실한 설이더라도 수사의 효율에 도움이 된다면 믿고 넘어가는 게 어때.” “엄벙덤벙 믿기만 할 거면 뭣하러 수사를 벌이겠어.” “믿는 것도 방편이라니까.” “그런 건 완벽히 의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핑계야.” 승강이에서 하차한 건 리아모였다. 그녀는 학회원들에게 그들이 불미스러운 사건과 물의와 인물에 연루되어버린 것에 대한 유감을 전했다.

 

한 시간이 조금 안 되어 모든 알리바이를 수집해 검토해볼 수 있었다. 각각의 사례들은 전후 관계가 상충되지 않고 대체로 매끄럽게 맞물려 온전하고 단일한 정황으로 구축되었다. 추가 진술을 요할 만큼 눈에 띄는 유별한 사건도 없었다. 샤덴은 일련의 알리바이 총합은 완전히 정합하다고 결론내렸다. 리아모는 이것으로 수사의 전짓불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며 회유하려 했고 샤덴은 거부했다. 이에 리아모는 알리바이가 정합함을 충족했으니 이 이상 따지고 들 여지도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아니, 그걸로 끝이 아니야. 알리바이가 정합하다고 하는 건 내적 정합성, 내적 무모순성에 관한 거잖아. 무모순함과 참됨은 다른 차원의 문제야. 예컨대 샤덴이 죽었다.’는 정보는 그 자체로는 모순이 없지만 사실은 아니야. 어떤 정보가 말이 된다고 한들 그게 정보에 대한 신뢰의 근거가 되진 못 해. 다시 말해 이들 중 누군가가 아귀에 들어맞는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뒤이은 샤덴의 논변에서 정초주의와 정합주의라는 개념이 출현하자 리아모는 손사래를 치며 앞으로 그의 수사권에 도전하지 않겠다 둘러대 면피했다.  

 

그럼 샤덴, 스스로 파괴한 기본전제를 어떻게 다시 세울 생각이야?” 샤덴은 응답자의 신뢰성 자체를 의회해볼 것이라고 답했다. 리아모는 손뼉을 쳤다.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거지?” 샤덴은 매우 비열한 방식의 인용이라며 일축했다.

 

샤덴은 학회원 중 특정인 한 명을 지목해 추가 심문을 진행하려 했다. 심문 중에 모순을 빚는 진술이 발굴된다면 그 응답자의 알리바이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혹자는 그에게 추가 심문의 사유를 따져물었다. 그는 심문에 앞서 해명해야 했다. 최초 목격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범죄수사학-어쩌면 그저 코난 아서 도일의 저서-에 근거한 이론을 소개한 뒤, 자신이 지목한 사람이 바로 본건의 최초 목격자에 해당하니, 이러한 대전제와 소전제의 마련으로 도출된 삼단논법의 결론은 자신이 지목한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리아모가 끼어들었다. “아니. 네 설명은 정합하지만 거짓이야. 너는 오전 여섯 시에 학회실에 들렸다면서. 너보다 일찍 학회실에 들린 사람은 아무도 없어. 최초 목격자는 너야.”

 

내가 학회실에 들렸을 때는 마도서가 제자리에 있었어. 사건이 발생하기 전이니 현장을 목격했다고는 할 수 없어.”

 

지금은 응답자의 신뢰도를 시험하고 있잖아. 어째서 네가 그 점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리아모의 힐문에 학회실의 모두가 열광했다. 샤덴은 이에 맞받아칠 수사법(修辭法)을 떠올리지 못해 수사법(搜査法)을 바꾸어야만 했다. 피에는 끝내 정초주의자가 되지 못한 그를 어엿비 너겨 위로했다.

 

샤덴은 좀처럼 감을 잡지 못 했다. 방법을 바꿔야 한대도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얼밋얼밋하다 리아모에게 곁눈으로 일별을 보냈다. 그녀는 기세를 몰아 수사 방책을 조언해 자신의 헤게모니를 공고히 노정했다. 그녀가 내놓은 방책이란 우선 교내의 감시 카메라부터 확인해보자는 것이었다. 샤덴은 학회실의 감시 카메라로 마도서가 도둑 맞는 시점을 확인하면 자연히 범인도 특정되리라는 점을 들어 묘안으로 평했다. “아니. 학회실 안엔 감시 카메라가 없는데.” 샤덴은 근무지의 포악한 치안 실태를 전해듣자 숨골이 아릿해졌다. 리아모는 손끝에 철창 말우리를 가리키며, “그랬다면 저 무각수 두 마리는 진작 단속됐겠지.”라고 단칼에 예증했다. 샤덴은 얼굴을 화끈거렸다. 그리고는 짐짓 ()각수라는 말의 낭비스러움을 지적하며 분위기를 무질렀다. “아무튼 반은 맞았어. 복도라면 카메라가 있거든. 이 방에 출입했던 게 누구였는지는 알 수 있어. ‘관계자 외 출입금지인 게 뻔한 학회실에 외부인이 들락거렸다면 그 사람부터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지.” 그들은 확신에 차서 경비실로 향했다. 그리고 사건 당일 학회실에 발을 들인 외부인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 말대로 범인은 학회원 중에 있는 건가?” 리아모는 숨을 들이켰다.

 

네가 남의 주장을 채택할 줄도 알았어?” 샤덴은 이어지는 그녀의 눈총을 감당할 수 없어 시선을 돌리며 말을 계속했다. 대견하긴 하지만 그건 아니야. 마도서를 들고 나오는 장면은 포착되지 않았어. 누가 훔쳤건 간에 훔친 뒤엔 가지고 나올 수밖에 없는데 말야. 설마 기껏 훔쳐놓고 학회실 안에 숨겼을 리도 없고, 우리는 대형 기자재가 부실해서 숨길 곳도 없어. 학회실의 창문은 가상 입체 영상이라 실제론 밖으로 통하지 않아. 2의 출구도 불가능해.” 샤덴은 엄지와 검지 뼘 사이로 턱을 받쳤다. 평소 흡연자가 아니었음에도 어쩐지 카멜이나 파이프를 한 대 물고픈 기분이었다.

 

범인은 광학위장으로 몸을 숨긴 걸지도 모르겠네.” 리아모가 그의 추리를 벌충했다. “열감지 카메라에서 별 이상은 없는데. 범인이 투명인간이 됐다고 쳐도 체온은 드러나야 해.” 샤덴이 반박했다. “적외선 차단제를 바르면 돼.” “이 정도 차단률을 가진 적외선 차단제는 공업용밖에는 없어. 범인은 이미 피부암으로 죽었겠는걸.” “적외선 차단제 차단제라는 게 있어.” “체온 말고도 광학위장 장치에서 발생하는 복사열은 어쩌고.” “2종 영구기관을 이용한 광학위장이라면 문제없어.” “열 변환만이 아니라. 광학위장을 구현하는 원리부터 가시광선으로 인한 발열을 수반해.” “이상적인 냉각기를 부착하면 해결될 문제야.” “만일 범인이 그렇게까지 채비가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면 괜히 좇지 말자. 우릴 흔적 한가닥 안 남기고 죽일 수도 있는 녀석일걸.” 샤덴의 항변에 리아모가 물러서며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

 

리아모가 학회실에서 마력 엔진을 안아들고 왔다. 그들은 새로이 전술을 짰다. 범인이 교내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일종의 함정 수사였다.

 

범인이 있을 것으로 상정한 구획에 마력 엔진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방송실에서 해당 구획에 한정해 긴급 안내 방송을 송출한다. ‘인근 연구실의 과실로 마력식 즉물 논리 폭탄이 점화되었으니 속히 대피하라는 내용이다. 즉물 논리 폭탄은 인쇄 활자 및 전자 회로 등 형식을 불문하고 연소 범위 내의 문서의 논리 정합성을 무너뜨리는 폭발물로, 정문은 비문으로 변이하고 두괄식 문단은 미괄식으로 개행되며 마침표마다 새싹이 돋아 쉼표의 형상을 갖추고 삼단논증의 중명사는 재정의의 오류를 내포한 양의적 어휘로 탈바꿈하며 서론과 본론과 결론의 면밀한 구문은 치즈가 패티의 아래에 깔린 햄버거의 구조처럼 목불인견의 양태로 뒤섞이게 된다. 즉물 논리 폭탄은 이토록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발휘하므로 대피는 차선, 저지가 최선이었다. 만일 현장에 있는 누군가가 마도서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이를 저지할 수밖에 없다. 마도서는 마력자가 유별히 들끓는 지점을 탐지해 그 연쇄 작용을 해제할 테지만 실제로 해제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샤덴과 리아모가 설치해둔, 다소간 마력자를 누출할 뿐인 무해한 마력 엔진일 것이다. 때문에 안내 방송의 경고에 아무런 구난 조치가 취해지지 않더라도 문제가 없다. 마력 엔진이 해제된다면 현장을 덮쳐 작업에 사용된 마도서가 피에의 도난품인지 식별한다. 그렇다면 검거하고, 아니라면 다음 구획으로 옮겨간다.

 

샤덴과 리아모는 하이파이브를 쳤다. 이 빈틈없는 계획을 검토할 때에 한 번, 계획이 순탄히 돌아가 열한 번째의 시도에서 마도서의 존재를 색출해내는 데에 성공했을 때에 다시 한 번 쳤다.

 

*

 

복도의 귀퉁이에서 분진이 일었다. 졸속으로 이루어진 마력 반응 해제로 엔진이 무리하게 작동을 멈추면서 매연이 뿜어져나온 탓이었다. 사람들은 아닌 때 닥쳐온 즉물 논리 폭탄의 재액으로부터 그들의 저작과 저술을 지켜내기 위해 저저마다 긴요하다고 판단한 문서들을 품에 안고 뛰쳐나와 난장을 이뤘다. 샤덴과 리아모는 주변의 방을 되는대로 열어젖혀대며 범인을 탐색했다. 곧 리아모가 피에의 마도서를 낯모를 사람이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두가 대피하는 가운데 그 방의 사람들만큼은 태연히 자리를 지켰다. 범인은 얼굴에 응달이 질 만큼 깊고 넓은 후드티 쓰개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무춤 뒷짐을 지는 양 마도서를 몸 뒤로 감췄다. 샤덴은 그녀에게 달려들어 마도서를 탈환하려 했으나 평소 타자기와 펜밖에 감당할 일이 없었던 유화한 완력으로는 과연 무리였다. 샤덴의 한아스러운 몸은 창졸간 그의 외팔 소맷자락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그 마도서는 우리 거야. 훔친 것 맞지?” 리아모의 삿대질이 그녀의 몸을 뚫고 지나 뒤편의 마도서를 가리켰다. “신고하진 않았어. 번거롭고 늘어지는 게 싫어서 직접 찾아왔거든. 뒤탈 없을 테니까 순순히 돌려주길 바라.” 범인은 발을 뒤로 떼며 입을 옹다물었다. 그러다 억눌려있던 용수철이 뻗치듯 분연히 마도서를 내밀어 보였다. “왜 훔쳤을 거라 생각하지? 이게 너희들 거라고 입증할 증거라도 있어?”

 

피에 선배가 그 마도서를 갖고 있었던 걸 알고 있으니까.” 직구를 맞은 리아모는 잠시 버벅댔다. “나는 피에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무구하고 천연한 변명에, 리아모는 맑은 잔물결에 산란하는 빛을 보는 것 같아 정신이 아뜩해졌다. “그리고, 이걸 봐.” 그녀는 리아모에게 닥쳐들더니 마도서의 책등을 가리켰다. 거기엔 천문학회 공동이라고 명기된 라벨지가 부착되어 있었다. “천문학회가 소유한 모든 물품에는 이걸 붙이도록 하고 있어. 이 마도서는 우리 거야.”

 

잘잘대던 중에 리아모는, 며칠 전 샤덴이 그의 전공 교수가 내놓은 이론을 어떻게 비판했는가를 떠올렸다. 순환논법에 대한 지적이었다. 그녀가 그건 순환논법하며 첫말을 틀려던 찰나, 누군가 말을 끼어들었다.

 

물품에 기명된 법인이 당해의 물품에 대한 물권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타당해 보여.” 지면에 전도됐던 샤덴이 바지를 털며 일어났다. 리아모는 샤덴이 말한 문장을 소화하고 나서 그에게 당황한 눈초리를 보냈다. 반면 범인 쪽은 황당해 했다.

 

그런데 아까 논리 폭탄이 터졌잖아. 그 기명은 변질된 거야.” 리아모는 모른 체했다. 일언반구 않고 그저 잠자코 지켜봤다. “원래 어떤 이름이 적혀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천문학회라고 기입되어 있지는 않았겠지. 논리 폭탄을 맞고서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었을 리는 없으니까.” 샤덴은 범인을 옆눈질로 쏘아보며 그녀의 지척을 맴돌았다. “마도서엔 천문학회의 명의가 기명된 바 없어. 따라서 이 마도서는 너희 게 아니야.” 범인은 말이 궁해졌다. “기존 명의가 상실됐으니까 물권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어. 이건 유실물로 수속해야 해.” 샤덴이 최종안을 제안했다. 천문학회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일제히 항의했다. 이곳에 있는 어떤 문서에서도 논리 폭파의 증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를 근거로 폭탄 점화 경고 자체가 거짓으로 폭파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설명해, 샤덴의 변론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샤덴은 이에 대해 자신은 천문학회의 어떤 문서도 읽어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고 일축했다.

 

이 이상 효력을 다툴 여력이 없었다. 사건의 재구성은 얼기설기 옭혀든 실뭉치처럼 대단히 피로한 것이 되어버렸다. 후드티는 선선히 마도서를 내주었다. “어차피 돌려주려고 했어. 내용물은 이미 해독했거든.” 리아모는 마도서를 받아들었다. 마주 본 후드티의 상쾌한 표정이 알알했다. 내용이래봤자 프로젝트 작업물밖엔 없다고 받아넘겼다. 후드티는 바로 그거.’라며 맞받아쳤다.

 

그게 왜 필요한데?” “천문학회도 외지 궤도 엘리베이터에 자극 받아서. 너네들처럼 성간이동 교통수단을 계획하고 있거든.” “그래서 남의 기술을 훔쳤어?” “막상 훔칠 것도 없던데.” 리아모는 혀를 찼다. 따진다고 바로잡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리아모는 돌아가려던 차에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에 문득 발이 걸렸다. 마도서는 어떻게 훔쳤는가 하는 것이었다. 갖은 억측을 낳았던 불가해한 범행 방식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에 대해 묻자 후드티는 구내식당에서 피에가 자리를 비웠을 때 훔쳤다해명했다.

 

*

 

어차피 범행은 들켰는데. 거기서 굳이 숨길 건 뭐람.”

 

돌아가는 길에 리아모는 톨톨댔다. 도난이 벌어진 건 물리학회실이었으므로, 구내식당을 운운한 후드티의 진술은 거짓 게 분명했다. 학적상의 위협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진 샤덴은 신경쓰지 말라며 리아모를 존조리 타일렀다. 리아모의 속살거림이 계속되어 그는 화제를 바꾸려 했다. 마도서를 살펴봐도 되냐는 것이었다. 그로서는 오늘 처음 알게 된 물건이니 아무렴 궁금할 만도 했다. 리아모는 흔쾌히 건네주었다. 그것은 속지가 해져 겉 보이는 두께에 비해 가벼웠다. 샤덴은 마도서를 초견했고, 이내 벌컥 경악했다.

 

이게 마도서라고? 마도서는 겉표지에 오망성이 그려져 있는 거 아니었어?”

 

샤덴은 눈을 홉떴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밤색 가죽 커버로 마감된 민무늬 표지였다. 아모는 무슨 싱거운 소리냐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마도서야.”

 

내가 아침에 학회실에서 본 건 이게 아니야.”

 

그제야 리아모도 샤덴과 비슷한 심사가 되었다. 둘은 학회실로 돌아가 진상을 확인했다. 샤덴이 아침에 목격했던 것은 마도서가 아니라 덧차원 기하학의 오각측량 교과서였다. 오각측량의 작도가 오망성과 닮은 생김새를 띈 탓에 벌어진 오착이었다. 아침 학회실에 마도서가 놓여있었다는 확증은 사라진 셈이었다. 리아모는 정합한 거짓이야기를 꺼내며 샤덴을 쏘삭였다. 그들은 후드티의 진술을 반추했다.

 

샤덴이 피에에게 탐문했다.

 

오늘 구내식당에 가신 적 있으신가요?” “. 갔어.”

 

소지품을 자리에 두고 어디든 갔다 오셨나요?” “. 갑자기 속이 안 좋아졌었거든.”

 

오이를 싫어하시나요?” “. 음식에 오이가 들어있으면 늘 빼놔.”

 

샤덴은 구내식당에 붙어있던 게시를 처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샤덴은 리아모에게 탐문 결과를 알렸다. 후드티의 진술을 신뢰해도 좋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들은 마도서를 유실물 관리소에 위탁했. 마도서는 유실물로 등록되고 일 분 후 피에가 되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