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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이 들이낀 하드록 트랙 양서토 - 2021.08.30. 제목이 왜 이래. A가 말했다. 이런 걸 소설적인 제목이라고 해. B는 칠판의 글자를 지시봉으로 두들겼다. 소설적인 게 뭔데. C가 토를 달았다. 사건성이지. 하드록 트랙이 들이낀 건 사건성이 있는 거야. 다시 A가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드록 트랙은 어딨는데. 지금 천장 스피커로 나오고 있어. 난 여기 천장이 있는 줄도 몰랐어. 우린 이걸 왜 하고 있는데. 튀는 글을 쓰면 반응이고 인기고 좋잖아. 재기발랄하다는 트렌드야. 그래? 그렇구나. C가 말을 마치자 B는 칠판을 냅다 쓰러뜨렸다. 갑자기 왜 그래. 이래야 고조될 것 같아서. 아니야, 그건 아니야. 다짜고짜 물건을 팽개치는 건 사건이 아니라 사고일 뿐이야. 핍진성에도 안 맞아. 사건이랑 사고는 뭐가 다른..
선인장 이하루 - 2021.08.18. 선인장이 죽었다. 적어도 그래 보였다. 색과 부피를 잃어버린 것들은 대개 그랬다. 연은 분재를 내려놓았다. 방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화는 조금 놀랐다. 연이 뜻밖에도 담담했다. 창틀로 바람 소리가 새들어왔다. 화는 마른 기침을 했다. 선인장은 하루 아침에 죽어버린 게 아니었다. 건조는 몇주를 거쳐 계속 되었다. 죽음의 기점을 그 진행 속에서 언제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다만 연은 선인장의 변색과 수축을 보며 각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났을 때 화에게 그것이 죽었다고 말했다. 익사가 아니면 외려 죽기도 어렵댔는데, 결국은 말라 죽었다고. 화는 연을 존조리 타일렀다. 꽃 터지는 것도 봤으니 나름 천수를 다한 거랬다. 쁘띠 다육이 그만큼 사는 거 쉽..
회로 이하루 - 2021.06.25. 무연이 언제까지 걸을 테냐고 말했다. 나는 그때 퍼진 훈김을 맞았다. 우리는 고층 타워의 전망대를 나란하게 내리 돌고 있었다. 이곳은 앉을 자리가 없었고 외각의 지상 망원경은 렌즈가 닫혔다. 밤인데도 안개가 끼어 여기로 오는 사람은 달리 없었다. 간혹 올라온 사람은 얼마 안 있어 도로 내려갔다. 전망은 어렴풋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주에 붉은 달이 뜨리라는 예보가 있어 전망대엔 그때에 올 셈이었는데, 그 약속은 결국 파했다. 무연이 그 날 다른 일정을 예정했고 도저히 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댔다. 무연은 실수라며 사과했다. 그리곤 대신으로 오늘 달을 보러 가자며 마물렀다. 그녀는 뭐든 자주 잊어버렸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마주 섰다. 무연이 이쪽을 또렷또렷 쳐다보며 낮..
2장. 부기명 마도서 분실사건 양서토 - 2021.03.07. 오전 강의가 있는 날이 아니라면 으레 느즈막이 일어나는 샤덴이 구내식당에서 조식을 들고 있었다. 관내엔 소슬하고 푸르스름한 볕이 들었다. 아직 새벽녘이었고 그 외에 사람은 없었다. 그는 요 며칠 간 계속 이 시간에 식사했다. 곧잘 인파가 쏠리는 시간에 왔다간 전공교수와 마주칠지도 몰랐다. 일전에 있었던 언어 윤리관 논쟁에서 샤덴이 판정승을 거둔 이후로 교수는 보다 열성적으로 샤덴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혹여 교수가 합석이라도 하게 됐다간, 그는 임의의 변별을 거쳐 학생에게 즉각적이고 즉흥적으로 구두할 수 있는 교육자로서 응당의 비공식 권한을 아마도 식사 시간 내내 행할 것이었고, 샤덴은 스스로를 그런 처지로 내몰고 싶지 않았다. 또, 그는 학회에서 멸시받았던 일을 계기로 면..
1장. 언어역학의 이론과 응용 양서토 - 2021.01.10. 제2대학 이학부에선 괴담이 돌고 있었다. 외지에 우주 엘리베이터가 세워졌다는 괴담이. 물리학과의 리아모는 당혹감을 느꼈다. 과학에서 뒤쳐진 외지인들이 어떻게 이쪽보다 앞서 그런 것을 만들 수 있었는가. 리아모는 그 괴담, 즉 확인되지 않은 가설을 거부했다. 그녀는 외지 엘리베이터 완공설을 대체할 새로운 가설을 고안했다. 해당 괴담에서 ‘궤도 엘리베이터’라는 정확한 어휘 대신 ‘우주 엘리베이터’ 따위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뭘 모르는 문학부 녀석들이 퍼뜨린 거짓 소문이 아니겠냐는 설명을 시도. 이 가설은 점심 식사시간에 동기들에게 제안되어 동료평가가 이루어졌고, ‘기존의 괴담보다도 더욱 개연적인 시나리오를 갖췄다.’는 평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학부 게시판에 ..
닫힌 계 양서토 - 2020.10.10. “문학을 다 읽고. 별일이네.” 렌코에게 상담을 구하던 메리가 가장 처음 듣게 된 말은 그것이었다. 메리는 침대의 위층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렌코에게 그녀의 시선이 꽂혀들었다. 지금 문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어름어름 대꾸하곤 끊겼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곰곰 듣고 있던 렌코는 질문의 얼개를 잡았는지, 느닷없이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녀들은 나란히 엎드려 누웠고, 침대의 아쉬운 너비에 맞추어 서로 어깨 한 쪽을 맞댔다. 메리의 질문은 엔트로피라는 개념과,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종말 시키는가에 대한 설명을 묻는 것이었다. 물리학부생인 렌코는 이내 쉬이 답변을 쏟아냈다. 그들은 수면 파자마 바람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학술적인 대화를 나눴다. 엔트로피 이론은 모든 에너지가 결..
이명 이하루 - 2020.11.04. 여행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난 피곤했고 씻지 못한 채 소파에 누웠다. 텔레비전 소리가 흘러나왔는데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 외에는 조용했다. 나는 거의 잠들어가고 있었다. 별안간 안이 방에서 걸어나와 나를 불렀다. 나는 일어나야 했다. 어둡던 마루에 불이 들어왔다. 귀가 계속 아파. 그녀는 오른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귀갓길 중에 안은 갑자기 귀울림이 들린다고 말했다. 귀 안쪽이 먹먹하고 경고음 같은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병원에 데려가기를 원했다. 그때가 오전 한 시였다. 나는 저절로 호전되기를 기다려보자 제안했고 우리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더러 조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맞아,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그녀는 말..
열사병 이하루 - 2020.08.08. J가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십 분 거리에 있다던 버스가 연착되던 참이었다. 다른 노선의 차량들이 정류소에 뜨거운 매연과 배기음을 끼얹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버려진 아이스크림 컵의 꾸덕한 녹색 내용물이 신발에 닿을까봐 몇 번씩 우리의 발치를 내려다봤다. 정류소엔 우리밖에 없었다. J는 데님 남방의 단추를 서넛 끌러, 팔과 함께 옷의 품을 등 뒤로 넘겼다. 속엔 민소매를 덧대 입었다. 동그란 어깨가 여름의 햇빛을 매끈하게 반사했다. 난 J의 상체 맵시를 처음으로 보고 있었다. 너 말랐네. 언제나 옷을 널널한 크기로 입는 고집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J는 뒤로 당기고 있던 견갑을 느슨히 이완시켰다. 더 이상 빠지긴 어려울 테니까 걱정 마. 나는 칠 ..